그림세계

고흐의 '낡은 구두 한 켤레'에 대한 다양한 해석

#경린 2018. 8. 7. 10:30


고흐 <낡은 구두 한 켤레 1886>


더 이상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낡은 구두 한 켤레

 낡아 빠진 구두에 내면의 절절함과 고통을 그대로 담아 낸 그림

고흐는 여러 작품의 구두 그림을 그렸다.

뒤집어 바닥을 보여 주기도 하고, 어수선하게 신발끈이 풀려 있기도 하고

주인의 고단한 삶처럼 가죽 표면이 거칠거칠하기도 한


현관문에 무심히 벗어 놓은 신발들

벗어 놓은 그 신발들에는 그 자리에 없지만 그 자리에 있는 듯

신발주인의 존재를 그대로 전달 해 준다.

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 부재중인 신발 주인의 존재는 많이 달라질 수 있다.

고흐의 그림들도 그렇다.


구두 한 켤레 1887.


고흐의 <낡은 구두 한 켤레>라는 그림을 두고 여러 철학자들이 의견을 달리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자신의 관심사인 '존재'와 '존재자'의 이론을

존재자인 '구두'를 통해 존재인 '농촌아낙네'를 그림에 접목시키면서

그림 외적인 요소들은 모두 배제하고 작품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를 주목하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그의 논문에 고흐의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 신발의 어두운 틈새에서는 농부의 고달픈 발걸음이 새겨져 있다.

신발의 질박한 무게 속에는 궂은 날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밭고랑을 오고 간

신발 주인인 농촌아낙네의 강인함이 배어 있다.

신발 가죽에는 대지의 촉촉한 물기와 풍요로움이 묻어 있고

신발 바닥으로는 해 저문 들길의 고독함이 밀려 온다.

대지의 소리 없는 외침은 익은 곡식의 선물을 전하고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경지 속에 일렁이는 대지의 알 수 없는 절규가 아롱져 있다.

이 신발에 스며 있는 것은 식량을 마련하기 위한 불평이 아닌 걱정이며

고난을 극복한 뒤에 찾아오는 기쁨이며

출산의 임박함에 따른 초조함이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떨림이다.

이 신발은 농촌 여인의 세계 속에 존속되어 있다.


‘예술작품의 근원’(Der Ursprung des Kunstwerks, 1952)-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존재하고 있는 신발을 통해 농촌아낙네라는 존재가 발하는 이미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그려진 '구두'의 재현이 아니고 존재자인 구두를 통해

농촌아낙네의 존재를 비은폐성으로 확연하게 드러낸다는 것으로

예술의 본질은 '진리의 비은폐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예술이란 존재자를 은폐시키지 않고 드러내어 존재의 의미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의 주체를 예술가로 보지 않고 예술의 근원은 예술가의 작품 그 자체로 보았다.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주관적 표현이 아닌 것으로 예술가는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에 정립되는 것'의

'통로' 역할을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구두 세 켤레 1886.


하이데거가 고흐의 <낡은 구두 한 켤레>를 해석한 것에 대해

미국의 미술사학자 샤피로는 그 구두는 농촌아낙네의 것이 아니고 고흐 자신의 것이라고 반박한다.


<낡은 구두 한 켤레>를 그릴 당시 고흐는 파리에 정착 해 있었고

파리에서의 고달팠던 고흐 자신의 모습을 구두에 투영시켜 표현한 자화상과도 같은 작품이라며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주체성과 자의식의 표현인데 하이데거는 그림 속의 예술가를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는 또는 해석할 때는 예술가의 상황이나

시대적인 배경이 동시에 고려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프랑스의 잘생긴 해체주의 철학자 쟈크 데리다는
그림에 나타난 구두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며
끊임없이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데리다는 예술작품과 존재의 관계를 최초로 설명하고자 한 하이데거를 높이 사고 있으나

하이데거의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일방적인 시선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예술의 주체성이 강조되면서 예술가의 이데아에 존재하는 것의 재현이라는 샤피로의 미학 관점도 비판한다.


데리다는 니체의 관점주의를 빌어 예술작품은 '생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또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진실을, 또 다른 시선을 열어준다는 주장으로

하나의 예술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말한다.

다양한 시각들을 생성 해 내는 예술작품의 끊임없는 미적 창조력, 풍성한 차이의 향연,

바로 거기에 예술작품의 진리가 있다고 본다.


데리다에게 있어 작품 해석은 중요하지 않다.

작품과 마주하면서 발생하는 경험과 흔적이 중요할 뿐이다. 

예술작품은 더이상 현실의 재현이 아니며, 작품 속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다.

흔적의 의미이지 모방해야할 진리가 있는 것도 아니며 기준점이 없이 해체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짜여진 구조적로 부터, 언어도, 사상도, 시각도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본다.


나막신 한 켤레 1888.


내 눈에는 나막신이 아니라 신사의 구두로 보인다.

중요한 모임이나 사람을 만나러 갈 때 신었지 않았을까?

단정하고 가지런하며 속도 환히 들여다 보이고 색도 분위기도 밝다.

살짝 닳은 굽에 비해 전체적으로 잘 보관이 된 것을 보면 소중하게 여기는 듯도 하다.


예술작품을 볼 때 샤피로의 주장처럼 예술가의 세계를 들여다보려고 하는 경향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 작품을 통해 예술가를 만나고 공감하며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작품을 이해하려 했다.

학교에서 배우기도 그렇게 배웠고 테스트도 그렇게 치뤄졌었다.

하지만 구두의 실제 주인이 고흐이고 그의 관점에서 작품을 들여다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샤피로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구두의 주인은 무궁무진 해 질 것이며

그에 따른 해석도 다양해지고 풍부해 질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낡은 구두 한 켤레'라는 제목으로부터도 자유로워 진다면 더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구두는 한 켤레의 구두가 아니게도 보인다.

두 신발 모두 어느 한쪽 발에 신는 신발처럼 보이기도 하고, 구두의 크기가 달라 보이기도 한다.

 

구두 한 켤레 1887.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자기표현으로 작품 속에서 예술가가 말하고자하는

메세지를 읽을 필요성은 있다고 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전문가들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보고 그림을 보면 더 깊이 있게 그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고

작품 속에 녹아 있는, 표현되어 지는 그 시대의 시대상과 작가의 세계에 감명 받고 감탄한다.


작자미상이거나 무제의 그림에서는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다양한 생각을 시선을 주장을 펼치고 헤집고 꼬집을 수 있도록 열어준다.

작품을 보는 관점이나 해석이 예술가 중심이 아닌 감상자에게로 오로시 주어 진다면 

그것은 또 다른 하나의 창조를 낳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그림을 그릴 당시 예술가가 작품에 담아 내고자 했던 이야기는

바로 그 작품에 오로시 남아 예술가와 함께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구두 한 켤레 18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