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고 흐린 날 / 이향아
바람 몹시 불고 흐린 날이면
모처럼 나를 대접하고 싶다
노을빛 심지에 불을 당겨서
조그맣게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이리
흔들리며 사라지는 그림자를 위해
이 세상 시계들은 일어나겠지
초침들이 행군하듯 지나가겠지
홀로 슬피 우는 것들,
홀로 울게 둘 수는 없다면서
시계들이 일제히 종악을 울리는가
너는 울지 말거라
내가 대신 울어주마
창문이 심난하게 덜컹거리는 날이면
지평선에 떠오르는 어떤 마지막
사기 등잔 감추어 둔 기름을 채워
모처럼 나는 나를 대접하고 싶다
흘러서 언제던가 잊을 뻔했던
낡은 약속 하나에 불을 켜고 싶다
비 오고 바람 부는
가을 날
외로운 무당벌레는
나뭇잎 두 장을
집으로 삼았나보다
바람이 많이 불었었는데
싸납게 비도 쏟아졌었는데
무당벌레는
나뭇잎 두 장으로
안식이 되었나보다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