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다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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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잔디를 깎고 있으면 기막히게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건 향기가 아니다. 대기에 인간의 숨결이 섞이기 전, 아니면 미처 미치지 못한 그 오지의 순결한 냄새다. 그러나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것도 모르고 오래도록 잔디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풀냄새 때문만은 아니다. 유년의 뜰을 떠난 후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의 열 곱은 되는 몇십 년 동안에 맛본 인생의 쓴 맛. 내 몸을 스쳐간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격렬했던 애증과 애환, 허방과 나락, 행운과 기적, 이런 내 인생의 명장면(?)에 반복해서 몰입하다 보면 그렇게 시간이 가버린다. 70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 거려준다. 그 물소리는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박완서 <호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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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의 뜰엔 풀도, 봉숭아 꽃도, 뛰어 놀았던 뜨락도, 집 앞에 흐르는 시내도 바람에 넘실거리는 논 밭도 없다. 도시에서 나서 도시에서 자라, 그런 초록의 기억은 없지만 다행히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을 이용해 외할머니와 함께 했던 초록의 기억들이 조각조각 남아 살아 날 때가 있다. 그 때는 그것이 그리움이 될 줄 몰랐다. 바쁜일상에서, 외롭고, 힘들고, 지칠 때 가끔씩 내 기억속을 뒤집고 일어서는 그 때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은 그 곳으로 가고싶은 마음으로 연결이 되어 한없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리운 외할머니의 다독임 모든 건 다 지나간다. 내 몸을, 내 맘을 스치고 지나가는 일 들 온 밤을 하얗게 세우게 했던 고민 들, 격렬한 소용돌이에 빨려 들것 같았던 순간, 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사랑과 행복, 더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슬픔과 아픔, 그 순간에는 영원으로 이어 질 것 같았고 긴 터널 같기도 했던 일들 지금세월의 곱을 지나 되새겨 볼 때 반나절 동안 대여섯 번도 더 연속 상연하여 곱씹고도 시간이 남는 추억으로 파 묻히리...... 지나고 나면 그리움이 되리..... 오늘 밖으로 나가 느꼈던 바람은 싱그러웠고 지금도 쉼없이 지나가고 있는 시간 위로 봄이 묻어 왔다. 그 위에 바쁨으로 덧칠하는 이 순간을 얹어 가슴에 묻는다. 2011년 2월 봄바람 묻어 오는 날 / 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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