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책 시절 / 허수경
도시에는 퍼런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살았던 시절
마을에는 아직 아이였던 군인들이 동화책을 읽던 시절
따뜻한 시절 지나간 시절 좋은 시절
오래된 집이 헐리자 빌딩이 솟아나던 시절
처마가 무너지자 새집에서 잠든 새끼새들이 마루로 떨어지던 시절
오디로 물든 보랏빛 입술로 아주 심심해서 햇살을 뚝뚝 끊어먹던 시절
동화책, 울지마, 우리는 동무잖아,
검은 잉크 우물에서 나오던 머리 잘린 금빛 잉어의 시절
남매가 달이 되고 해가 되는 시절
과자로 만든 집의 시절
굶는 아이들이 숲을 헤매다 포크레인에 깔리던 시절
가족들이 슬픈 눈을 가졌던 시절
가족이 침침한 전등 밑에서 잘고 잔 밤을 깎던 시절
동화책, 울지마, 우리는 동무잖아,
군인들은 용감해서 모든 화산과 대양에다 찢어진 치마를 꽃던 시절
총 맞아 죽은 독재자를 위한 장례식의 시절
모든 학교 마당에 우렁찬 군령이 울리던 우국결사의 시절
라면을 끓이다가 나가서 죽은 자를 보내던 시절
염전으로 목장으로 하루품을 팔러 다니던 시절
검은 안경을 쓴 아버지들이 목욕탕에서 때를 밀던 시절
동화책, 울지마, 우리는 동무잖아,
섣달 그믐에 잡귀가 문에 걸린
채의 구멍을 세다가 날이 밝아와서 화다닥 도망치던 시절
계간 『시와 반시』 2010년 봄호
허수경 / 1964년 경남 진주 출생.
경상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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