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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박경리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며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 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 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 바라보면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이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행선지도 있었고 귀착지도 있었다 바이칼 호수도 있었으며 밤 하늘의 별이 크다는 사하라 사막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사연이 있는 그 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히말라야의 짐진 노새와 야크의 슬픈 풍경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적인 여행이든 사라졌다간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고 남아 있는 모든 기운을 사르면서 남기신 39편의 시를 모아 책으로 묶었습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가다듬고 가다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어 가면서 슬프고 슬프고 또 슬펐습니다. "불꽃 같은 정열로, 분노로, 사랑으로 생애를 사셨고, 한 땀 한 땀 바느질하시듯, 수놓으시듯 정성으로 글를 쓰셨습니다. 글쓰기를 통하여 삶을 완성하시고 죽음도 완성하셨으니 평안하소서!" / 김영주 - '서문'중에서-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 모른다. / 박경리 2011년 1월 박경리 유고시집을 여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