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주저림

그 길 위에

#경린 2011. 2. 5. 21:34


너 도 바 람 꽃




아들애 딸애 나란히 부처님 전에 절하고 대웅전을 나와 절 난간에 기대 서니 계곡이 발 아래다. 따뜻한 햇살에 얼었던 계곡물이 녹기 시작하였지만 산 속의 공기에 아직은 녹음보다 얼음이 많은 빤질빤질 하얀 반짝임 속에서 지칠줄을 모르고 썰매를 타는 아이들이 멀리 보였다. 이른 봄 새벽 해가 떠 오르기도 전 손전등을 들고 친구와 올랐었던 저 길 30년이 지난 지금... 그 세월만큼 벚나무는 더 굵어졌고 산전 수전 연륜을 안고, 남녘에 96년 만에 찾아 온 추위도 잘 이겨내고 늠름히 하늘을 받치고 서 있었다. 근데 예전의 그 풍경은 없다. 계곡으로 오르는 그 길, 산으로 오르는 그 길, 차들의 주차장이 되어 흡사 차들의 전쟁터 같았다. 하긴 나 역시나 차를 끓고 예까지 올라와 섰으니... 큰 바위, 작은 바위, 큰 돌, 작은 자갈 돌, 한 곳에 어우러져 물길을 이루었던 계곡도 이제는 시멘트로 돌들을 옴짝 달짝 못하게 묶어 잘 정비(?)를 해 두었다. 한무리 썰매를 타는 아이들 웃음 너머 아롱아롱 아지랭이가 피어 났다.


남 산 제 비 꽃



친구와 도란도란 발 맞춰 오르다 옆 길로 살짝, 진달래 입에 물고 까르르 떠 오르는 해를 안고 약수물 들고 통통통 뛰다싶이 내려가며 까르르 소똥 구름에도 웃는 단발머리 여중생의 머리 위로 하얀 벚꽃잎이 날린다 눈송이처럼. 사월 초파일 아카시아 꽃 은은한 향으로 하얀 웃음 흘릴 때 몇 날 밤을 세워 만든 외삼촌의 분홍색 연등을 들고 연분홍 치마저고리 입고 올라오시는 우리 엄마. 옥빛 날아갈 듯한 치마에 검은 물들이고 동백기름에 반지르르 쪽진머리 휘휘 가쁜 숨 몰아쉬며 올라오시는 울할머니 옥빛 나는 하얀 고무신. 한여름 때꼬장물 쫄쫄 흐르는 가시내들 멱감고 가재 잡고, 다래에 깻목 따 먹다 노을보며 삼삼오오 이리저리 와르르 뛰고 굴리며 내려갔다 올라 갔다 한다. 길의 맞은 편, 계곡 입구를 지켜주는 아름드리 노란 은행나무할머니가 열매를 쏟아낼 즈음, 가을 억새를 보러 오르는 사람들 사이 오빠 허리춤 수건 잡고 오르는 가쁜 숨소리 헉헉. 하얀 눈이 대웅전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소복히 쌓이고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을 밟으며 아버지와 딸들이 새길을 만든다 그 위로 눈이 또 가득 내린다.


노 루 귀



햇살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계곡 얼음 한 쪽은 그 햇살에 녹아 졸졸졸 봄을 안고 흐르고 하얀 얼음 위에서는 아쉬운 겨울을 안고 썰매타며 내지르는 환호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입춘이 지났다지... 절기는 정확한거야 봄을 안은 햇살 속으로 지나가는 바람이 포근하다. 곧 잠자고 있던 개구리가 튀어 나와 저 녹고 있는 개울에 어김없이 알을 낳겠지 이제 개구쟁이손님을 받을 일 없는 개울은 금방 올챙이 놀이터가 되어 빡작거릴 것이고, 양지바른 저 들녘에 봄처녀들 발길 끊긴지는 오래지만 봄 나물 뽀죡뽀죡 올라와 지천으로 초록을 올릴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30년 이라는 세월.. 지나고 나니 참말로 눈 깜짝할 새다 그리움에 지난 밤 이리뒤척 저리뒤척 했던 이유 그 길에 가서 다 보고 왔다. 그 길 위에 2년 동안 먼 길 다녀와야하는 아들아이의 안녕을 빌며 함께 한 추억을 얹었다. 스치는 바람에 봄이 묻어 왔다.

2011년 2월.그 길 위에 / 린
산 수 유


사진 : 풀꽃님(http://blog.daum.net/wildf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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