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세계

향토적인 서정주의 한국의 고갱 - 화가 이인성

#경린 2010. 8. 1. 11:55

 

 

 

모자를 쓴 자화상 1950 나무판에 유채

 


해당화 1944  캔버스에 유채  228.5X146cm  호암미술관 소장


온일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72 x 90cm

 


정원  1930  캔버스에 유채   90.9x89.3cm

 


 

어촌 덕적도 풍경  캔버스에 유채  32x41cm


 

계산동 성당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35.5x45cm


여름 실내에서  1934  캔버스위에 수채  71x89.5cm

 


경주 산곡에서 1935  130.5X195.6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가을 어느날 1934  96X161.4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책 읽는 소녀  1940  캔버스에 유채  40.9 x 31.5cm

 


백장미 1940  나무판에 유채  45.3X37.3cm

 




화가 이인성 이인성은 일제 치하인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열살이 되어서야 대구의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대구화단의 선구자 서동진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 15세 때의 일이었다. 2년뒤인 29년 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7세의 나이로 입선하며 화단에 입문했다. 주위의 후원으로 31년 도쿄 유학을 떠나, 낮에는 화랑직원을 하고 밤에는 태평양 미술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졸업장은 물론 없다. 유학시절 조선미전 수상뿐 아니라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입상, 일본 수채화회전 최고상 등을 기록했다. 특히 그는 수채화에서 탁월한 예술성을 발휘했다. 강렬한 원색과 강한 대조, 그리고 불투명의 짧고 단속적인 붓터치로 유화의 수준에 비견될 만한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조선미전에서 데뷔한 후, 8년간 '카이유'(32년 가을) '가을 어느날'(34년)을 비롯,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35년) 등 무려 12점의 입선작과 6점의 특선작을 내는 대기록을 세웠다. 35년 귀국한 그는 대구 남산병원장의 딸 김옥순과 결혼해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된다. 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 됐으나, 이듬해 순경과 사소한 언쟁끝에 총기 오발사고가 일어나 아깝게 요절한다. 그에 대해서는 관전(官展)을 발판으로한 출세지향적 작가라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보통학교만 겨우 졸업한 가난한 이인성에게는 관전이 활동무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여러 화집을 참조하면서 독학한 이인성은 서구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뤘다. 그가 '한국의 고갱'으로 불리는 까닭을 그의 그림들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인성은 조선미전에서 6회 연속 특선 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고, 37년엔 불과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초대작가가 되는 등, '조선의 지보(至寶)' '화단의 귀재'로 불리며 신화적인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그와 동시대의 작가인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이 50~60년대에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기 시작해 70~80년대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과 대비된다. 이인성의 대표작은 '경주의 산곡에서'(35년)으로, 98년 월간미술이 평론가 13명에게 의뢰해 선정한 '한국 근대유화 베스트10'에 김관호의 '해질녘'과 함께 공동 1위로 선정됐던 작품이다. 그외에도 '가을 어느날'(34년) '복숭아'(39년)' '해당화'(44년) '카이유'(32년) '아리랑고개'(34년) '여름 실내에서'(34년) 등이 있다.






사랑아 / 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