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세계

화가의 연인들 / 라파엘로, 달리, 샤갈, 모딜리아니, 구스타프 클림트, 고야, 보티첼리, 루벤스

#경린 2011. 2. 13. 08:54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 / 라파엘로



육감적인 '라파엘로'의 애인 'Fornarina'는 만년에 경건한 화풍에서 벗어난 '라파엘로'가 현실적이고 세속적으로 변해가는 화풍의 주인공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르게리타 루티, 아버지가 로마 산타도레아 가두의 빵집 주인이었기에 ‘제빵사의 딸’이라는 뜻의 ‘라 포르나리나’라 불렸다. 라파엘로는 그녀를 모델 또는 시녀로 처음 만난 후 사랑에 빠졌고, 초상화뿐 아니라 ‘시스티나 성모상’, ‘의자의 성모상’ 등 대작의 모델로 삼았다. 요절하기 전에는 그녀 앞으로 막대한 재산을 남기기도 했다. 그림 속 마르게리타의 표정은 라파엘로의 다른 작품에서 느껴지는 고귀함과 우아함보다는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림은 사실을 숨기지 못한다. 당시 라파엘로가 여인을 바라보던 시선과 생각이 그대로 녹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녀의 왼팔에 끼워진 팔찌에는 ‘라파엘’이란 글자가 보인다.



모피 / 루벤스



이 그림이 그려지기 8년 전 53세의 루벤스는 그림의 모델이 된 육감적이고 젊은 16세의 엘레네 푸르망과 재혼했다. 루벤스는 엘레네를 너무나도 사랑하였으며 그것은 엘레네도 마찬가지 였다. 그래서 엘라네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린 <모피>는 루벤스 개인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사적인 작품이었고 단 한번도 그들의 집 밖으로 전시된 적이 없으며 팔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완성된 2년 후 루벤스는 엘레네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루벤스는 죽으면서 유언장을 남겼는데 그 내용중 특별히 이 작품은 엘레네에게 주는 작품이라고 기록된 사실만로도 그의 그림에 대한 마음을 알 수 있다. '루벤스'를 잃은' 엘레네'가 남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없애버리려고 했던 그림이기도 하다.



독사를 목에 감은 클레오파트라 / 보티첼리 시모네타는 이 작품에서 클레오파트라로 환생했다



보잘것 없는 몸매의 소유자였던 보티첼리는 시모네타를 처음 보자 바로 사랑에 빠진다. 당시 시모네타는 피렌체의 모든 남성들로 부터 선망의 대상이였다. 그녀에게 가까히 할 수가 없었던 보티첼리는 시모네타가 22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죽게 되자 '비너스의 탄생'과'프리마베라'등 그림속 관능의 주인공 얼굴로 시모네타의 모습을 자주 등장시켜 자심만의 사랑으로 이어나갔다. 보티첼리의 사랑으로 시모네타는 예술로 다시 살아나 우리앞에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시모네타가 죽은지 34년 후 보타첼리는 침대에서 죽어가며 시모네타의 발 끝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알바 공작 부인 / 고야



알바공작부인은 고야 전기에 화려한 화제를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고야의 작품에 등장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다. 2년 후 미망인이 된 그녀를 방문, '오직 고야뿐' 이라는 명제가 붙은 유명한 <검은 옷의 초상>을 제작하였다. 공작 부인이 오른 손으로 가리키는 지면에 '알바 공작 부인에게, 프란시스코 고야, 1795년' 글이 씌어져 있다. 경직된 자세라든가 인형과 같은 무표정한 모습과 차가운 인상을 풍기게 하는 그림으로 평온한 마음이 아닌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 / 구스타프 클림트



14명이 넘는 사생아가 있었던 클림트의 생애에는 중요한 두명의 여자가 있었다. 자신의 자식을 둘이나 낳아준 노동자 출신의 '침머만'과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의 처형인 사업가 '에밀리'다. 58세로 문란했던 삶을 마감할 때 까지 '침머만'과는 밤 이외의 다른 관계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침머만'과 그의 아이들에 대한 연민을 '희망1'[Hope I 1903]이라는 작품에 담기도 하였다. 한편 '침머만'과는 달리 동생이 일찍 죽은 후 자연히 그의 딸 '헬레네'의 후견인이 되자 동생의 처형' 에밀리'와 가까이 되면서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결코 정신적인 관계 이상의 선은 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클림트'는 이 두 여성 어느쪽하고도 결혼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18년 심장발작으로 죽음을 눈 앞에 둔 클림트가 마지막으로 애타게 찾은 여인은 '에밀리 플뢰게'였고 그녀 역시 '클림트' 사후 다른 남자와는 결코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



큰 모자를 쓴 쟌느 에뷰테론느 / 모딜리아니



32세의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서 화가지망생이며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19살의 잔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아이도 낳지만 가난한 화가로 살았다. 파리의 한 자선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그의 연인 "쟌느" 역시 모딜리아니 죽음 이틀 후 둘째를 임신 한 몸으로 그녀의 친정집에서 자살하였다. 아마 그녀에게는 모딜리아니가 없는 세상은 '불꺼진 창'이나 마찬가지 였는지 모른다.



생일 / 샤갈



여자 친구의 집을 방문 했다가 우연히 만난 벨라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하게 될때는 샤갈의 나이는 22살 이였다. 가난한 생선장수의 유태인 아들 샤갈과 러시아 비테프스크에서 여러 개의 보석상을 운영하는 부유한 상인의 지적인 딸, 벨라. 그녀 부모로선 결코 환영할 수 없는 결혼이었다. 그러나 내성적인데다 말까지 더듬고 종종 간질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던 샤갈에게 벨라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반려자였다. 벨라는 샤갈 작품의 완성을 확인하는 판정자였으며 제목을 고르는 일도 했다. 샤갈보다 아홉살이나 적은 나이였지만 벨라는 마치 어머니같은 포용력을 지닌 존재였다. 샤갈 가족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벨라는 낯선 타향땅에서 전염병으로 숨을 거뒀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품세계의 여신이며 인생의 동반자인 벨라를 갑자기 잃은 샤갈은 9개월 동안이나 붓을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졌다. 벨라를 잃은 후 한 동안 샤갈의 화면은 깊은 푸른색이 지배한다. 후에 이 푸른색은 정제되고 단련되어서 가히 "샤갈의 푸른 색"이라 할 맑고 환상적인 색채에 이르게 됐다. 그리고 65세가 되던해 샤갈은 다시 25세 연하의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 바바를 만나 해로하게 된다.


갈리 / 달리



살바도르 달리하면 절대 떼어 놓을 수 없는 이름 '갈리' 축제를 의미하는 이름을 지닌 이 여인은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인 엘뤼아르의 아내였고 에른스트의 연인이었다. 엘뤼아르와 헤어지고 중년이후 50년을 달리의 아내로 살았다. 달리가 갈라에게 한 엽기적인 프로포즈 일화도 유명하다. 겨드랑이에 썪은 양파를 끼고 무릎뼈에 난도질을 한 후 알몸으로 갈라에게 청혼했다고 한다. 정열이라고 해야할지 광기라고 해야할지... 평범한 여성이 이런 프로포즈를 받았다면..... 엽기적인 프로포즈를 받아들인 갈라는 역시 당대의 세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여인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