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가는 시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경린 2012. 10. 27. 13:52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처럼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이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의 제목은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의 한 구절이다. 나도 그 구절 앞에서 가슴이 멘 적이 있다.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살고 싶다는 낭만적인 꿈은 하늘의 별을 따고 싶다는,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어떻게 보면 찬란한 꿈과 다를 바 없다. 그런 꿈을 거세당한 사람들에게 시인은 이런 시를 보여주고 싶었을까. 무엇에 대해 좋아하는 느낌을 공유하는 사람을 만나면 술부터 한잔 따르고 싶어진다. 김사인 시인이 그렇다. 이십여 년 전, 어느 깊은 밤에 그이와 우연히 만났을 때, 백석을 좋아한다는 말 하나로 그 밤이 즐거운 적이 있었다. 인생을 탕진한다는 말, 사내라면 이 아름다운 퇴폐와 무능력의 유혹을 한번쯤 꿈꿔 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대책 없이 늙어가는 일은 시에서나 가능한 일인가?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중에서


 



녹록치 않은 세상사 살아가다보면 저러한 생각을 한 번쯤은 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 남자들만 그러할까.....^^


표 정 / 임웅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