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가는 시

아름답기는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은 것 / 첫 - 김혜순

#경린 2012. 11. 23. 11:44

 



첫 / 김혜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은 사진첩을 열고 당신의 첫을 본다 아마도 사진 속 첫이 당신을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사랑하는 첫은 사진 속에 숨어 있는데 당신의 손목은 이제 컴퓨터 자판의 벌판 위로 기차를 띄우고 첫, 첫, 첫, 첫, 기차의 칸칸을 더듬는다 당신의 첫,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옛날 당신 몸속으로 뿜어지던 엄마 젖으로 만든 수증기처럼 수줍고 더운 첫 뭉클뭉클 전율하며 당신 몸이 되던 첫 첫을 만난 당신에겐 노을 속으로 기러기 떼 지나갈 때 같은 간지러움 지금 당신이 나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고 있으므로 당신의 첫은 살며시 웃고 있을까? 사진 속에서 더 열심히 당신을 생각하고 있을까? 엄마 뱃속에 몸을 웅크리고 매달려 가던 당신의 무서운 첫 고독이여. 그 고독을 나누어 먹던 첫사랑이여 세상의 모든 첫 가슴엔 칼이 들어 있다 첫처럼 매정한 것이 또 있을까 첫은 항상 잘라버린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첫이 끊고 달아난 당신의 입술 한 점



첫. 첫. 첫. 첫 자판의 레일 위를 몸도 없이 혼자 달려가는 당신의 손목 두 개 당신의 첫과 당신 뿌연 달밤에 모가지가 두 개인 개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달려가며 찾고 있는 것 잊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잊어버린 것. 죽었다 당신의 첫은 죽었다 당신의 관자놀이에 아직도 파닥이는 첫 당신의 첫 나의 첫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첫 오늘 밤 처음 만난 것처럼 당신에게 다가가서 나는 첫을 잃었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그럼 손 잡고 뽀뽀라도? 그렇게 말할까요? 그리고 그때 당신의 첫은 끝, 꽃, 꺼억 죽었다. 주 긋 다. 주깄다 그렇게 말해줄까요?

 



김혜순의 「첫」을 배달하며 / 나희덕 '첫'이라는 말에 당신은 누구를, 또는 어떤 순간을 떠올리셨나요? '첫'이라는 말이 되돌려주는 냄새, 소리, 맛, 빛깔, 온도 감촉은 바래지도 시들지도 않은 채 여전히 싱싱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끝내 닿을 수도 없는 순결한 기원. 그래서 '첫'은 관형사나 접두사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고유명사로, 과거형이 아니라 늘 현재형으로 우리 마음속에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영원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던 최초의 방 그 문지방을 넘는 순간 이미 문 밖의 생(生)은 시작되었지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첫’을 향해 매순간 걷고 있는 나와 당신의 발자국소리……

 



첫사랑, 첫키스, 첫경험, 첫여행, 첫애기, 첫직장, 첫만남..... 세상에 너무나도 많이 있는 처음들 '첫'이란 고유명사가 붙여져 뿌려놓인 잔해들은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회만 주어지면 모가지를 쑤욱 때로는 빼꼼 내밀며 시간여행을 즐기다 다시 제자리로 간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에 붙이는 고유명사 '첫' 시간이 지나면서 되돌아보면 퇴색되기도 하고 부족한 점에 지우고 싶은 것도 있었을 테지만 처음이기 때문에 그 만큼 더 노력하고 더 설레였음일까 그것은 분명 시작이고 과정일 뿐일진데 그 '처음'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며 본질보다도 더 크게 의미부여를 하여 사람들은 간직하기를 좋아한다.

 



그 동안 나에게 왔던 처음의 순간들...... 되짚어 보는 그 추억 여행들이 자꾸 흐릿해져 가는 속에 다시 나에게 올 '첫'은 또 얼마나 될까...... 시간이 더디디더디게 가던 그 옛날의 시간처럼 화살과도 같이 지나가는 이 시간 속에서도 그 '첫'이 설레임으로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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