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가는 시

공구통을 뒤지다가 / 박상순

#경린 2018. 11. 19. 15:40



공구통을 뒤지다가 / 박상순


아홉 살의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공구통을 뒤집니다.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

아주 튼튼한 놈들만 긁어모았습니다.


당신께 보냅니다.


내년엔 나도 열한 살이 됩니다.

열 살 때의 일들은 그냥 없던 걸로 합시다.


당신께 보냅니다.

즐거운 편지처럼


내년엔 나도 통통한 애인과 함께

오동도나 제주도

아니면 카프리 섬의 소형 버스 안에서

삼십대를 보냅니다.


껄렁한 이십대는 없던 걸로 합시다.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봇,

아주 뾰족한 놈들만 당신께 보냅니다.


선물로 보냅니다.


내년엔 나도 여덟 살이 됩니다.

여덟 살의 나로 다시 돌아갑니다.


당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구멍을 뚫고, 튼튼한 나사못으로

당신이 가는 길을 막아버린 뒤


다시 아홉 살이 되면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내 인생의 공구통을 뒤지다가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내게 남겨진

당신과 나의 기나긴 이별의 편지를.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중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공존하는 듯한 시

그 많은 나에게 보내는 선물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은

가는 길을 막아버리기 위한 것들

되돌아간 그 길을 되돌아 와 당신과 내가 다시 만나지 않기를

기나긴 이별 통보를 하지만, 없던 걸로 하고 싶지만

다시 견뎌 내어야만 하는 생의 한가운데....


낯선 시인과의 첫 만남

서먹, 부담, 난해, 묘한 끌림, 감염....

거듭 되는 만남

그때마다 다른 시어로 바뀌어 다가오는

슬픈 이별 편지들....


사진-창원 주남저수지의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