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가는 시

"응" / 문정희

#경린 2012. 6. 10. 10:29

"응" /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목숨의 노래 / 문정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 문정희 -네루다 풍으로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구절을 이 나이에 무슨 사랑? 이 나이에 아직도 사랑? 하지만 사랑이 나이를 못 알아보는구나 사랑이 아무것도 못 보는구나 겁도 없이 나를 물어뜯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열 손가락에 불붙여 사랑의 눈과 코를 더듬는다 사랑을 갈비처럼 뜯어먹는다 모든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숨막히고 그래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



사랑은 장님입니다. 나이도, 국경도,체면도 몰라보기 때문입니다. 다 알아보고 가릴 것을 가린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요. 사랑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미래도 불투명합니다. 그래도 사람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요. 모든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무죄야"라고. - 하응백

 



키 큰 남자를 보면 /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1997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두 조각 입술 / 문정희 닫힌 문을 사납게 열어젖히고 서로가 서로를 흡입하는 두 조각 입술 생명이 생명을 탐하는 저 밀착의 힘 투구를 벗고 휘두르던 목검을 내려놓고 어긋난 척추들을 밀치어놓고 절뚝이는 일상의 결박을 풀고 마른 대지가 소나기를 빨아들이듯 들끓는 언어 속에서 하늘과 땅이 드디어 눈을 감고 격돌하는 순간 별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빙벽이 무너지고 단숨에 위반과 금기를 넘어서서 마치 독약을 마시듯이 휘청거리며 탱고처럼 짧고 격렬한 집중으로 두 조각 입술이 만나는 숨 가쁜 사랑의 순간


머리칼 / 문정희 뭉툭 잘라낸 한 웅큼의 솔잎, 그날 밤 짙은 솔 향내를 풍기며 내 손 안에서 꿈틀거리던 아름다운 침엽수 네 머리칼 내 잠 속에 살며 사락사락 자궁에 고치를 지어 기억처럼 긴 비단실을 뽑아내는 네 머리칼 너 없이 내 몸에 피 도는 일 없고 너 없이 나의 잠도 없으니 어떤 시간도 갉아먹지 못하는 사철 푸르른 소나무의 기억 떠날 때 내 몸속에 담아 함께 떠날 것이니 그날 밤 뭉툭 잘라낸 한 움큼의 젊은 침엽수 지상의 나의 몸인 네 머리칼


딸아! 너는 결코 그 누구도 아닌 너로서 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당하게 필생의 연애에 빠지기 바란다. 연애를 한다고해서 누구를 카페에서 만나고 함께 극장에 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종류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리라. 그런 것은 연애가 아니란다. 사람을 진실로 사귀는 것도 아니란다. 많은 경우의 결혼이 지루하고 불행한 것은 바로 그런 건성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딸아! 진실로 자기의 일을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응석 떨지 않는 그 어른의 전 존재로서 먼저 연애를 하기를 바란다. 연애란 사람의 생명 속에 숨어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푸른 불꽃이 튀어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를 말한다. 그 에너지의 힘을 만나보지 못하고 체험해보지 못하고 어떻게 학문에 심취할 것이며 어떻게 자기의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냐. 그러나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깊고 뜨겁고 순수한 숨결을 내뿜는 야성의 생명성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 시인 문정희 - <월간 작은이야기 6월호 중에서>


마음에서 그려지는 자연스러움을 비판적이지 않고 관념적인 상징 없이 표현해 내는 문정희님의 시는 어렵지 않게 잘 읽어진다. 시인이 자신의 원초적 본능, 자연스러운 몸의 욕망과 시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그녀의 시는 건강하고 솔직하다. 거침 없는 시어로 선명한 목소리로 부르는 그녀의 시 두 번째 시집인 『새떼』(1974년)에서는 6편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삭제 처분 받기도 했다는데..... 미화시키고 포장하고 감추는 것이 아닌 솔직한 표현의 뜨거운 열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보자



Dark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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