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가는 시

달팽이네 동네도 집값이 넘 비싼가보다 / 민달팽이 - 김신용 / 도장골 시편-김신용 / 달팽이에게-박범신

#경린 2012. 9. 8. 21:42

 




달팽이에게 / 박범신 크면 나쁘고 작으면 좋은 것들은 있다 세상엔 가령 네 집이 그래 너는 세상에서 제일 크고 높은 집을 꿈꾸지만 세상에서 제일 크고 높은 집은 네가 가져봐 이쪽 배추에서 저쪽 돌미나리로 이사도 못 가고 홀로 죽을 때 누가 있어 허물어지는 네 집의 서까래들을 붙들어 주겠니

 




달팽이집 / 김환영 달팽이는 날 때부터 집 한 채씩 달고 왔으니, 월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전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몸집이 커지면 집 평수도 절로 커지니, 이사 갈 일 없어 좋겠습니다! 사고 팔 일 없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같이 추운 날에 쫓겨 날 일 없어 좋겠습니다! 불 지를 놈 없어 좋겠습니다!

 




도장골 시편 (민달팽이) / 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폐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테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비 오는 날 기왓장 위를 기어가는 민달팽이를 봤다. 집이 없는 민달팽이 집을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이고 지고 다닐 집이 없는 것인지... 달팽이네 동네도 집값이 넘 비싼가....?? 비님이 오시니까... 비 맞으러 나왔나보다 반가운 맘에 버선발로.... 그나저나 되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