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가는 시

오탁번 시 - 메롱메롱 / 달걀

#경린 2015. 8. 7. 22:10

 



메롱메롱 / 오탁번 팟종에서 파씨가 까맣게 떨어지자 깨알 쏟아지는 줄 알고 종종종 달려가는 노랑 병아리가 참말 우습지? 쇠파리 쫓는 어미소 꼬리에 놀라 냅다 뛰는 젖 뗄 때 된 송아지처럼 내 유년의 꿈이 내달리던 들녘은 옥수수수염처럼 볼을 간질이며 메롱메롱 자꾸만 속삭인다 장수잠자리 한 마리 잡아서 호박꽃 꽃가루 묻혀 날리면 제 짝인 줄 알고 날아와 잡히는 수컷 장수잠자리도 용용 쌤통이지? 내 유년의 꿈을 실은 장수잠자리가 투명한 헬리콥터 타고 커다란 겹눈 반짝이며 꿈결 속 하늘로 날아온다 호적등본에나 남아있는 줄 알았던 추억의 비행장에서는 까망 파씨와 종종종 병아리와 금빛 송아지와 별별 장수잠자리가 날마다 꿈마다 뜨고 내린다 밤송이머리에 중학생 모자 쓰고 떠나온 고향 길섶에 심심하게 피어있는 민들레도 홀씨 하얗게 하늘로 날리며 메롱메롱 나를 부른다

 



달걀 / 오탁번 『메롱메롱』이라는 시를 쓰면서 밥 먹으면서도 오줌 누면서도 고치고 또 고쳤네 잡지 <ㅁ>에 팩스로 보낸 다음 그래도 맘이 놓이지 않아 '현대시선독' 강의시간에 학생들한테서 최종 강평을 받으려고 부랴부랴 작품을 복사하기로 했네 이천백 원 건네주고 받아든 <메롱메롱>을 복사한 A4 60부가 복사기 열이 그대로 남아 따듯했네 아 내 영혼에서 갓 꺼낸 따근따근한 시여 그때 따근따근한 달걀이 문득 생각났네 암탉이 둥주리에서 꼬꼬댁꼬꼬댁 내려오면 쪼르르 달려가서 꺼내오던 달걀의 온기가 손에 전해져 왔네 달걀 한 꾸러미 장날에 내다 팔아서 문화연필이랑 유엔성냥을 사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네 셈본시험 백 점 받아온 날이면 아나 이건 너 먹어라 하면서 어머니가 주시던 빨간 피도 살짝 묻은 갓 낳은 달걀이 따근따근한 온기를 그냥 지니고 『메롱메롱』이라는 시가 되어 나온 것일까 "메롱"하며 혀를 쏙 내민 아이들의 말을 흉내 내며 쓴 시에는 '추억의 비행장에서는 까망 파씨와 종종종 병아리와 금빛 송아지와 별별 장수잠자리가 날마다 꿈마다 뜨고 내린다'라는 참말 우스운 말이 있다네 '별별 장수잠자리'의 간질간질한 뜻을 ☆☆을 칠판에 그려가며 설명하니까 학생들이 눈을 커다랗게 떴네 따끈따끈한 달걀 하나씩 받아든 교실에 별 둘 단 장수잠자리가 막 날아다녔네

 



마음에 쏙 드는 시선집 하나 내고 싶었다 알콩달콩 우리말의 숨결이 자지러지는 시에 나는 내 목숨을 준다. 한 시인이 일생 동안 수백 편의 시를 발표하지만 백년 후에 과연 몇 편의 작품이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시와 1:1로 마주서 있는 내 모습이 처연하다. 2013년 정월 시집 <눈 내리는 마을>에 실린 시인의 말

 



철부지 어린아이의 해맑은 모습이 담겨 있는 시어 하나하나에서 아이처럼 기뻐하는 시인의 모습과 삶, 생각이 잘 드러나 있어 잼나게 읽기 쉬우면서도 쉽게 다가가 공감하게 되고 유년으로 함께 첨벙하여 깊이 헤엄치다 나온 듯합니다.^^ 어린아이 같이 영이 맑은 시인의 눈을 들여다 보는 듯 시를 읽는 동안 밝아 지는 미소가 절로 피어났습니다. '메롱메롱'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강의를 할 때 아이들이 맹하게 한 눈을 팔거나 딴소리를 할 때마다 제가 하던 말들이 날라다니기도 했습니다. "메롱메롱 할래? 메롱거리지 말고 또이또이 해라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