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히 - 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만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사이
절깐을 짓더라도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한다.
인제 시들해졌다는 말씀인가?
그래서 기다리든 말든 딴전이나 좀 피우겠다는 것인가?
약속을 어기고 고작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
가벼히 생각하'겠다고? 유치한 가학취미인가?
아닐 것이다.
이 시를 가만히 더듬노라면 나는 온몸의 맥이 풀리고 가슴이 서늘해진다.
'애인'과 '한눈팔기'와 '풀잎사귀'와 '절 한 채'로 이어지는 마음의
보폭에는 뭔가 아름답고 신비로운 바가 있다.
그리고 행간에 서린 허허로움, 덧없음과 혼곤함, 청초함들.
그 모든 표정의 착잡함을 시인은 '가벼히'란
어휘 하나의 절묘한 뉘앙스로 능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연시란 예로부터 대개 북받치는 그리움의 하소이거나
어긋남의 회한, 자탄, 원망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이 시가 보여주는 마음의 길은 어떤가?
연정의 뜨거움과 조급함과 정면성을, 서늘함과 해찰과 엇지르기로
에돌아 지체시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그리움을 더 생생하게
보전하고 누리는 기술, 사랑의 총량을 키우는 기술!
이 독보적인 마음의 기술과 미학으로써 미당은 비로소 미당일 터이다.
빠른 춤보다 느린 춤이 어렵다는 것을 아는 이라면,
이 시의 '한눈이나 좀 파'는 일이며, '가벼히'란 것이
결코 말처럼 수월한 경지가 아님도 짐작할 것이다.
김사인 <시를 어루만지다> 중에서
빠른 춤보다 느린 춤이 어렵다는 것
미친 듯이 일만 하는 것
열렬히 사랑하는 것
아니면
뭔가에 푸욱 빠져 사는 것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가벼히' 하는 것
사진 - 통영의 해질녘 달아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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