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세계

왕따 소년 고흐의 스케치

#경린 2015. 6. 20. 14:43

우유 주전자 . 1862

고흐(1853.3.30~1890.7.29)


1853년에 태어난 고흐는 1890년 서른 일곱 되던 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하고 그리기 시작한 것은 스물일곱살 때부터로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을 걸었지만 화가로서의 1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900여점의 유화와 1000점 이상의 데생과 수채화를 그려 냈다.
어림잡아도 1년에 200점, 이틀에 한 번 꼴로 그림 한 점씩을 그린 것이다.
이런 대단한 열정의 그를 사람들은 '태양의 화가'라 부르며
인간의 영혼이 드러나는 그림을 그린 '영혼의 화가'라고도 부른다.

 

다리 . 1862


촌스런 붉은 머리, 구부정한 어깨, 고집불통에 느릿한 행동의 고흐는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혀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 가정교사를 모셔 가르쳤지만
1년 동안 자그마치 가정교사를 여섯번이나 바꿔야 할 정도로 적응을 못하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해 목사인 아버지에게 걱정거리인 큰아들이었다.
학교생활에는 부적응이었지만 자연과 예술을 사랑한 고흐는
숲에게 말을 거는 바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시를 사랑하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위 '우유주전자'와 '다리'의 연필 스케치를
고흐가 아홉살 때 그렸다하니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하다.  

 

Vicarage and Church at Etten


"오빠는 언덕이나 골짜기에 핀 들꽃 이름 하나하나를 다 알았어요.
심지어는 어느 자리에서 어느 꽃이 피어날지도요.
종달새 한 쌍이 호밀밭 귀퉁이에 보금자리를 틀었다던지
두더지가 땅굴을 새로 팠다던지 하는 것도 다 알았다니까요.
오빠는 억새풀을 건드리지 않고 살금살금 다가가 새알을 엿보기도 했지만,
어미새가 싫어할 만한 짓은 결코 하지 않았죠."
고흐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의 오빠에 대한 회상을 보면
고흐가 얼마나 감성적이고 자연을 사랑하였는지 알 수 있다.
고흐에게 친구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대자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

고흐는 편지를 쓸 때 스케치를 그려 넣는 습관이 있었다.

 


학교와 사회생활에도 부적응한 왕따였지만 고흐에게는 좋은 습관이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풍경을 일상적으로 노트에 스케치하는 습관은
외롭고 힘들 때 스트레스를 해소 시켜주기도 하였고, 자기 방식으로
사물을 볼 줄 아는 예술가로서의 감수성을 키워 주었다.
취미인 독서와 감동적인 명언이나 시들을 노트에 옮겨 적는 습관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 주는 텃밭이었고 자신의 생각을 적절한 
비유와 인용을 구사하여 논리적으로 이끌어 내는 능력을 길러 주었다.

 

헤이그에 있는 공원의 연못

본격적으로 화가 수업을 받기 전에 그린 그림


고흐는 큰 화상(상업적으로 화가들의 그리믈 사고 파는 사람) 이었던
백부의 추천으로 헤이그에 있는 화랑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고흐는 맘껏 그림을 접할 수 있는 직업에
적극적이었고 그림에 대한 소양을 기르는 일에도 열심이라 런던지점으로
승진하는 등 주위로부터 유망한 젊은이로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스무살무렵 제비꽃처럼 수줍어 고개 떨구며 짝사랑하였던
하숙집 주인딸에게 사랑을 거절 당하는 상처를 입고
다시 어둠에 갇히게 되어 직장도 잃고 방황하게 된다.

 

교회 안에서 잠든 브르타뉴 노파 . 1873

연필과 흰 분필로 그렸다.


고흐는 역시 백부의 소개로 화상이었던 바로 아래 동생 테오와
각별한 사이였다. 동생에게 보낸 편지가 무려 668통이나 된다니
형제의 우애가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테오야, 훌륭한 화상이 되려면 화가 못지않게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하라고 충고하고 싶구나.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란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사람이거든 -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해변 . 1876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그린 스케치

학교 교실에서 바라다보이는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