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가는 시

한글 뗀 기념으로 쓴 시 / 시가 뭐고?

#경린 2015. 12. 21. 21:39

 


군데군데 맞춤법이 틀린 삐뚤빼뚤한 글씨체. ‘절제의 미학’과는 거리가 먼, 투박하기까지 한 표현. 이런 시집이 발간된 지 2주일 만에 초판본 1000권이 매진됐다. 경북 칠곡군의 할머니 87명과 할아버지 2명이 함께 낸 시집 『시가 뭐고?』다. 시집은 할머니·할아버지들이 한글을 깨우친 기념으로 만들었다. 지난해 한글을 배우기 시작해 올 5월 시를 지었다. 시를 쓴 데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 강사가 그냥 “짧은 시를 한번 써 보라”고 한 게 전부였다. 그랬더니 할머니들이 이런 시를 지었다.

 


칠곡군은 처음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지은 시 98편을 그냥 보관해 뒀다. 이걸 지역 문인들이 보더니 “감성이 예쁘다”고 평했다. 그래서 시집을 내게 됐다. 칠곡군 이한이(54) 평생교육담당은 “그래야 감성이 살아날 것 같아 맞춤법이 틀린 부분을 그냥 뒀고, 할머니·할아버지들의 글씨체도 그대로 살렸다”고 말했다. 각 시의 제목 역시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처음에 적어 놓은 그대로였다. 지난달 칠곡군이 인쇄료 1300만원을 들여 151쪽 분량의 시집 초판본 1000권을 찍었다. 출판사 ‘삶창’은 이 시집을 교보문고와 인터넷 서점에 권당 정가 9000원에 내놨다. 그게 2주일 만에 다 팔렸다. 삶창 황규관(48) 대표는 “순수한 시골 할머니들이 솔직한 눈으로 바라본 그들만의 세상에 독자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가 뭐고?』 서평에서 고영직(48) 문학평론가는 “시인들이여, 시가 뭐고?”라고 문단에 화두를 던졌다

 


할머니들은 겸연쩍다는 반응이다. 시집 제목이 된 ‘시가 뭐고?’를 쓴 소화자 할머니 “생각나는 거 몇 자 종이에 기린(그린)긴데, 아이고 부끄럽데이”라고 했다. 김말순 할머니는 “내가 시인? 그냥 시골 할매라카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칠곡군과 출판사는 시집 재판본을 만드는 중이다. 오는 21일에는 할머니·할아버지들에게 출판기념회를 열어주기로 했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은 『시가 뭐고?』판매 수익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내놓기로 뜻을 모았다. 칠곡군은 내년에 할머니·할아버지들의 시를 더 받아 『시가 뭐고?-두 번째 이야기』를 발간할 예정이다. [출처: 중앙일보] 한글 뗀 기념으로 쓴 시, 1000권 팔릴 줄 몰랐다카이

 


이 책을 기획한 (사) 인문사회연구소 신동호 소장은 기획의 말에 이렇게 썼다. "내가 마을에서 만난 할매들은 "경로당 화투치냐"며 면박을 주는 타짜이고, TV드라마를 끊임없이 삶의 경험들과 직조하는 스토리텔러이고, "먼저 간 영감이 못 알아볼까 봐 들고 갈라고" 혼서지를 보관한다는 로맨티스트이며, "찬바람 고들고들 할 때 볕에 날라리날라리" 무말랭이를 말린다는 이야꾼이었다. 할매들의 뼈에 새겨진 이야기 속에는 몸에 마음에 깃든 무늬, 삶의 주름, 수많은 이들(사람, 짐승, 식물 등)의 거처가 생생하고, 이웃이, 마을이, 지역이 한몸에 들어 앉아 살고 있었다."

 


까막눈으로 칠십평생을 살다가 한글을 배우고, 순수한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솔직한 눈으로 바라본 그들만의 세상을 시집으로 출간하고, 수익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내놓은 마음이 훈훈하고 절로 미소 지어지는 이야기 요즘에는 시집을 사기 위해 9000원을 쓴다는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2주만에 1000권이 팔렸다니 대단한 일이다. 순수한 마음과 인정에 메말라 있던 우리들에게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해 주는 시들에게서 그리운 할머니 내음도 나고 해질녘 밥 짓는 연기 모락모락 피어나는 풍경이 그려지기도 한다.

 


참새 / 김무임 보리밭에 참새들이 보리를 따 먹다가 나한테 들켜 훨훨 날아가는 것을 보니 저 참새가 조그만 배나 채워갔는지! 내 양심에 미안하구나 농가 먹어야지 / 박차남 마늘을 캐가지고 아들 딸 농가먹었다 논에는 깨를 심었는데 검은깨 농사지어서 또 다 농가 먹어야지 깨가 아주 잘 났다 비가 와야대갰다 / 김말순(79) 비가 쏟아져 오면 좋겠다 풍년이 와야지대갰다 졸졸 와야지 고구마, 고추, 콩, 도라지 그래야 생산이 나지. 글 / 박점순(74) 시를 쓰라하니 눈아피 캄캄하네 글씨는 모르는데 어짜라고요 이레 속고 저레 속고 / 이분란 어린 시저레 초등학교 3학년예 아버님 살든 집을 다시 짓타가 다처서 병원에 수술을 받게 댓다 병원생활 일년을 하다보니 엄마가 하신 말씀이 우리 분란이 학교 고마도라 우리집 살림을 사라야 댄다 여자은 공부를 안 해도 댄다 하셨다 학교로 안 가니 너무 맘이 아파 밥도 안 먹고 누버서 우럿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대로 안됐다 울고 있으니 엄마가 아버지 병원 퇴원하면 학교 보내주겠다 그 말에 속았다 이레 속고 저레 속고 한평새 다 갔다 눈 / 박후불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눈이 침침해서 칠판에 글이 안 보였다 눈물이 났다 안과에 가서 수술을 했더니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칠판에 글이 잘 보인다 글이 잘 보여 눈물이 났다 심봉사도 나만큼 좋아했나

 

1일 경북 칠곡군 북삼읍 마을회관에서 할머니들이 직접 쓴 시를 들어보이고 있다. 
시집은 2주 만에 1000권이 팔렸다. [프리랜서 공정식]
[출처: 중앙일보] 한글 뗀 기념으로 쓴 시, 1000권 팔릴 줄 몰랐다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