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닿는 대로

산청 남명조식 유적지 - 덕천서원, 세심정

#경린 2016. 6. 17. 18:03


덕청서원 앞 덕천강 기슭에 세워져 있는 세심정( 洗心亭)


남명선생의 제자이자 유명한 성리학자였던 최영경이 1582년(선조15년)에

덕천서원 유생들의 휴식처로 세운 정자라고 합니다.



남명선생이 직접 심어 수령이 400년 이상이라는 은행나무가 있는 덕천서원 정문



수령높은 배롱나무가 있는 안마당


서원은 조선시대 사설 교육기관이자 유학의 발전에 공을 세운

대학자나 나라를 위해 충절을 바친 선현들을 제사하는 곳이다.

이 곳 덕천서원은 남명조식(1501~1572)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선생이 돌아가신 4년 뒤인 1576년(선조9)에 창건되었다.



키 낮은 창문이 특이



서원의 터는 작은 집을 지어놓고 선생을 모시고 노딜던 장소를

하응도가 기증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1602년(선조35)에 중건하였으며, 1609년에 덕천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



이후에도 여러차례의 중수를 거치다가 1870년(고종7)에 불탄것을

하재하들이 중건하여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서원의 배치는 전형적인 서원의 배치양식인 앞에는 학문을 위한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례의 공간을 두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덕천서원 안내문에서 가져온 글>


지리산에 안개가 피어 오르는 모습



덕천서원 근처에 남명조식 탄생 500주년을 맞아 2004년에 완공되어

남명 선생의 유품과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남명조식 기념관이 있습니다.



남명 조식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 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적극 변호하여 파문은 가라앉았다.

1559년(명종 14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에 임명되어 부임했었으나,

부임한지 얼마 뒤에 스스로 사직서를 냈다.


그가 출사를 거부하고 은신한 것에 대해 후일 유홍준은 '남명의 이러한 복거와 불출사는 결코

죽림칠현 같은 은일자의 모습도 아니고 공자의 제자 안회와 같은 고고함의 경지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세상을 외면해버린 은둔자가 아니었다.

그가 세상에 나아가지 않음은 시세가 발이나 씻고 있음이 낫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평하였다.

이후에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고, 이황과 사림들이 그를 추천했지만 그는 한사코 사양하였다.

이황은 그에게 한성부로 올라올 것을 권고하지만 이것 역시 거절한다.


<백과사전에서 가져 온 글>



천왕봉을 바라보며 심었다는 매화나무와 산천재



1561년 지리산의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의 체계를 이룩하였다.

(주역에 '山天 大畜'괘를 따서 이름 지었다. 제자를 크게 키운다는 말이다.

'山天'은 하늘을 품은 산을 뜻한다.) 남명은 번잡한 김해를 떠나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산에 자리잡고 산천재를 짓고서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덕산에 묻혀산다(德山卜巨)'라는 시를 지었다.

이 칠언절구는 산천재 네 기둥의 주련에 새겨 있다.


<백과 사전에서 옮겨온 글>




율곡, 퇴계와 더불어 조선 3대 철학가이며 대학자로 알려져 있는 인물 남명조식

율곡이나 퇴계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은데 조식은 많이 낯설었습니다.

지기의 설명과 포스팅을 하면서 조금은 깨우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