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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하버마스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 하상복

#경린 2018. 9. 8. 18:20

인간해방, 자유, 평등의  민주주의, 인간의 무한한 물질적 능력의 실현인 자본주의 등을

추동한 힘은 바로 이성이었다. 또한 서구의 근대라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이성은

지배적 집단 정신이 되어 정치.사회적으로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서유럽의 근대성은 세계대전과 제국주의로 인한 식민지개척 등 자신들의 가치와 이념을

보편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갈등과 폭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일군의 연구자들은 근대성을 보편을 가장한 일방주의적인 폭력으로 이해하면서

그것의 무용성과 폐기를 주장한 반면(푸코), 다른 연구자들은

근대성에 내재한 보편적 원리를 부각시키면서 그것의 사수를 강조하기도 한다.(하버마스)



이 책에서 다루게 되는 두 연구자는 이러한 서구 근대성의 문제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으면서 정반대 모습의 연구결과를 보이고 있다.

푸코에게 근대성은 배타적인 지배원리의 이성이 보편적이고 실증적인 지식의 외양을 통해

그 권력성이 은폐되거나 인지의 범위를 벗어나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무용하거나 부정한다고 주장한다. 근대의 이성과 합리성이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라고 본다.

반면 하버머스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이성은 인간삶의 해방을 이끈 힘으로 근대 민주주의

동력이었다고 본다. 푸코의 분석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지만 근대이성의 보편적이고

긍정적인 힘을 강조한다. 푸코와 같이 서구 근대 사회의 이성을 무조건 해체하기 보다는

근대 민주주의를 이끈 이성의 힘을 새롭게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영역 속에서 그 가능성을 모색하려고 한다.


푸코(1926~1984)는 왜 반근대주의와 반이성주의 철학자가 되었는가?

그의 삶을 돌아보자

그의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외과의사를 지낸 전통있는 의사집안에

태어났으나 푸코는 의학도의 길을 거부하였다. 아버지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이 컷다.

인문학도의 길을 걷지만 동료들과의 다툼이 잦았고 자살 소동까지 벌여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권위적이고 도덕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열살 아래 후배와 동성애를 하였으며

동성애가 왜 일탈적 성욕으로 규정지어 지는가? 정신병 환자는 왜 분리 되는가? 에

대해 의심하고 회의해야 했다. 다른 때에도 프랑스 아닌 다른 곳에서도 동일한가? 에 대해...


푸코가 근대의 발명품으로 정의 내리고 공격한 정신병과 표준화된 성욕은

사실상 푸코 자신의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개인사에 투영된 근대의

폭력성이 자신의 문제만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했다.


푸코는 어떻게 지식(통계학, 정신병리학, 우생학 등)이 권력과 결탁하여 인간을 통제 해

왔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주체는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주체화 되어 가는 과정이 다르다고 보고 장소와 달력에 대한 개념을 중시하였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광인이나 나병환자 그리고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시대에는 동성들간의 사랑(우애)를 더 중시하기도 하였고

옛날에는 광인을 신성시하기도 하였던 적이 있고, 죄인은 신체에 처벌을 하였다면

근대에는 가두어서 인간주체를 끝없이 정신적으로 교화하려고 한다.

신체처벌은 잠깐이지만 가두어 교화함은 더 괴로움인 것이고 통제인 것이다.

우리의 조선시대만 해도 감옥에 몇 년씩 가두었다는 말은 없다. 매나 유배였지

비정상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비정상의 분리 감금은 병원(근대에는 수용소였으나 19세기에 병원으로 바뀜)

으로 시작하여 감옥, 학교, 병영, 공장 등으로 확대 되었고 푸코는 이를 원형감옥 파높티콘에 비유한다.

제도적 교화 프로그램을 통한 감시와  통제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인해 스스로를 감시하게 된다.

원형감옥은 정보사회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우리사회를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도 수업이 내 행동이 녹화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주거, 교육, 계좌, 검색, 이동....그 외 나도 모르게 감시 당하고 있다는 것.


푸코는 타인에 의해 나를 만들어가는 타자성을 강조하였고 이것을 언어에서 찾았다.

언어가 타인과의 약속을 통해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타자성이 생기고 자신의 내면을 망각하고

타인에 대한 강박증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은 정신병에 걸리 수 밖에 없으며 산업사회라는 현대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를 성찰해서 자기자신 만의 것 나를 나답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를 완성하고 소통했을 때 행복이 생긱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윤리적주체를 강조하였다. 자기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의 영혼을 연마하고

자신의 참된 모습을 솔직하게 말하는 언어적 실천 과정을 통해 형성된 윤리적 주체는

우선적으로 통지자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하지만 그는 1984년 57세의 나이에 에이즈로 사망하였다.

 

 

하버마스는 서구근대를 이끈 이성이 과연 부정적인 모습만 지니고 있는가 물었고,

서구의 근대가 간직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서구 근대이성으로부터 어떠한 희망도 빛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 푸코와는 달리 이성의

잠재력과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려한 이성주의자다.


하버마스의 사상 또한 개인사적인 경험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입천장이 갈라져 명확한 발음을 구사하기 어려운 구개 파열이라는 기형을 갖고 태어났으며

여러차례 받아야했던 고통스러운 수술은 인간 본질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다.

타인 앞에서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없었던 경험은 하버마스가 언어와 의사소통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 나치즘에서의 군사적 연류는 진보적 정신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어떻게 민주적 정신성을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하버마스는 행위자들 간의 열린 의사소통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곧 공론장과 열린 대화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다.

근거를 통한 타당성을 주장하였고 의사소통행위의 합리성으로 상호 이해를 지향하였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언어와 기술합리적 세계언어(체제언어)로 구분을 하였고

의사소통행위는 생활세계 언어의 사용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하였다.

의사소통행위는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며 공통된 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이 있어야 소통이 가능하다.


역사적 맥략에서 볼 때 부르주아는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상업경제 활성화를 위해

절대왕권과의 정치적 결탁관계를 끊고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하버마스가 고찰하고자 했던 부르주아 공론장이다.

애초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 공간으로 시작된 부르주아 공론장은 점차 국가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여론이 조성되는 정치적 공간으로 진화해나갔다.

부르주아 계급들이 주도한 일련의 사회.문화적 변화의 결과물이다.

개인과 사생활은 부르주아 사회가 발견한 새로운 가치였다.

부르주아 사회는 이러한 문학적 경험들이 반복되고 지속될 수 있도록 일종의 제도적 틀을 구축해냈다.

가정 내부에 존재하는 살롱, 가정 밖에 존재하는 커피하우스, 공공도서관, 독서클럽 등과 같은 제도다.

가정내부는 여성, 가정 밖은 남성들의 공간이었다.

부르주아 공론장은 기존의 정치적 질서와 공권력에 대한 비판 기능을 수행했다.


하버마스는 이런 공론장 분석을 통하여 서양 근대 사회에 내재된 이성과 합리성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부르주아 공론장에서 만들어진 이성적이고 공개적인

토론의 힘인 전체 의견이 단순히 의견의 집합이 아니라 여론이 되고,

부당한 공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도덕적 원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이 사회의 어딘가에 숨어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부르주아 공론장이 실현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촛불시위를 참여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로 평가할 수있다.

촛불시위야 말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공통된 인식으로 합리적 의사소통을

이끌어낸 합의를 반영한 것으로 이것을 생활세계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의 정치적 희망은 이렇듯 생활세계 내 합리적 의사소통의 활성화에 자리하고 있다.


서로 다른 시각에서 이성을 논한 두사람의 대립되는 해석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세지는 나에게는 제법 강렬했다.

한편으로는 공통점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날이 선 대립을 보여주는 두 철학자의

이야기에서 푸코의 자신을 배려하며 자신에 몰두하며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인 '자기배려'와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긍정적인 힘을 생활세계 내에서 찾고 있는 하버마스의

역설이 매력적이었다. 근대를 이끌어온 이성과 현시대의 문제점 해결에 대한

푸코와 하버마스의 논의를 통해 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