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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처럼 소통하라 - 정창권

#경린 2018. 10. 10. 03:27


인간은 가정과 사회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

그 속에서 무엇보다도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을 하고도 있다.

sns의 발달로 실시간의 소통뿐 만아니라 1대 다수의 소통까지 가능해진 시대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불통의 고통을 더 많이 호소하는 경우도 있고 피해를 보는 사례들도 있다.

문자로 전달하는 과정은 한계가 있기도 하여 오해의 골이 깊어지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중심적으로 일방적인 말만하면서

상대가 이해해주기만을 바라는 욕심이 갈등과 다툼의 불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을 듯하다.


저자는 현시대 불통에 대한 답을 찾고자 옛 사람들의 편지에 주목한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과 맘을 담아 써 내려 간 손편지

그 편지들을 통하여 진정한 소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 알려주고자 한다.


저자는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며 그것을 그대로 편지글에 옮겨

지시하고 명령하는 자세를 불통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보았으며

소통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으로부터 시작됨을 강조하였다.


조선 양반사대부  남성이 상대를 배려하며 부인이나 딸들에게 쓴 한글편지는

구어체로 평상시 대화하는 것처럼 쓰여졌으며 당시의 생활상과 솔직한 감정이

그대로 표현되어 그들의 드러나지 않았던 개인사와 성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정조의 편지를 시작으로 이순신, 이황, 박지원, 명성황후, 정약용, 선조, 인선왕후와

그 외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까지하여 12명의 편지글을 소개하면서 소통과 불통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인 인물들이 또 조선 사대부 양반들이,

그리고 아녀자들이 어떻게 소통하였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이들의 편지글 속에서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소통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전달 해 주고 있다.


 



정조의 편지에서는 껄껄이라는 표현이 자주 보이는데,

이는 한자어 가가(呵呵)’를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요즘 우리가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자주 쓰는 ㅋㅋ와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정조는 이미 18세기 후반에 오늘날의 카카오톡과 같은 가가오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는 비밀을 지키지 않은 심환지를 질책하면서

 이 떡을 먹고 이 말을 말아라라는 속담, ‘경은 이제 늙어서 머리가 세었다’,

 ‘경은 과연 생각 없는 늙은이라 하겠다같은 비속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

정조는 신하들과 소통함에 있어서 왕의 권위를 내려놓고 아주 솔직하게 얘기했던 것이다. -


<편지정치의 달인, 정조> 중에서
  


옛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고 상당히 솔직하게 표현한 듯하다.

우리가 메시지를 주고 받을 때 사용하는 ㅋㅋ를 이미 정조는 200년 전에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적대 관계에 있던 신하에게 왕의 권위를 내려놓고 격식 없는 말투로

정사를 논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군왕은 친밀하지 않으면 신하를 잃는다. 현명한 신하를 사사로이 대하는 까닭은

사사로이 대하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신하를 알아 본 현명한 임금의 소통방법 이었던 듯하다.



나신걸은 현대의 부부보다도 더 애정 표현을 솔직히 하고 있다.

집에도 다녀가지 못하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울고 가네”,

 “이런 민망하고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라고 하면서

아내가 보고 싶다거나 울고 싶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나신걸은 아내를 매우 존중하고 있다.

그는 편지에서 계속 ‘~하소’, ‘~하네라고 경어체를 사용하고 있다.

편지 끝부분에서도아내에게 올립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 부부의 평등한 소통법> 중에서


군관으로 근무하였던 나신걸이 갑작스럽게 멀리 전근을 가며 아내에게 쓴 편지는

 1490년대에 쓰여진 것으로 한글이 반포되고 불과 50년도 안 된 시기였다.

그 짧은 시기에 한글이 완전히 보급이 된 듯하고

양반사대부가 아내에게 애정을 가득 담아 경어체로 한글 편지를 썼음을 보여준다.




정일당은 오늘날의 문자 메시지와 같이 짧게 쓴 쪽지편지라는

독특한 소통수단을 통해 남편의 멘토 역할을 했다.

당시는 남존여비의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였고 남편이 바깥채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쪽지편지는 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를 조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 내용도 성격이나 생활습관, 학문, 스승, 인간관계, 손님 접대, 서당 일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정일당은 수많은 쪽지편지를 통해 남편 윤광연의 멘토 역할을 해주었다.

 어찌 보면 쪽지편지는 아내의 잔소리와도 같은 것인데,

신기하게도 전혀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일당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다양한 소통법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에겐 엄격하지만 남에겐 관대했던 진정한 유학자였다.


정일당이 만년에 병으로 신음하다 세상을 떠난 뒤 남편 윤광연은 몹시 슬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스승이 죽었으니 앞으로 의심나는 것이 있어도 누가 그것을 풀어주겠는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도와주겠는가?

내게 잘못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바로잡아주겠는가?

내게 허물이 있더라도 누가 그것을 훈계해주겠는가?

지극히 타당하고 바른 논의와 오묘한 뜻을 어디서 듣겠는가?

심신을 수양하고 품성을 닦는 방도를 어디서 배우겠는가?

내가 큰 과오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모의 가르침 때문이고,

스승과 벗으로부터 훈도를 받는 것도 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공은 역시 부인이었다.


정일당이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1836년에 윤광연은 아내의 문집

'정일당유고'를 간행했다. 당시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내의 문집을

간행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엇고,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다.


<남편을 변화시킨 쪽지편지>중에서


아무리 존경을 담은 편지라고는 하나 아내의 사사건건한 쪽지편지를

마음으로 새기고 행동하는 윤광연의 인간됨도 상당함을 알 수 있는 듯하다.




이순신은 제찰사 이원익에게 휴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이순신의 군사적 소통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그야말로 수작(秀作)이다. 편지의 핵심 내용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 늙으신 어머니가 순천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계시는데 근처에 음흉한 왜적들이 진을 치고 있어 늘 걱정하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장수로서의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항상 걱정만 할 뿐 벌써 3년째 가보지 못했습니다.
· 얼마 전 어머니가 편지를 보내오길 죽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간절히 말했습니다.
· 과거 함경도 권관으로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도 살아생전에 약 한 첩 해드리지 못하여 평생에 한이 되었습니다.
· 이제 어머니는 여든한 살이 되셨는데, 만약 이번에 어머니를 뵙지 못하면 다시는 모실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 다행히 지금은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입니다. 고로 며칠 휴가를 얻어 늙으신 어머니를 뵙고 오고자 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진지로 복귀하겠습니다.
 
이처럼 이순신은 왜 지금 휴가를 가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그와 함께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더욱 감동적으로 상대를 설득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상사를 설득하는 최고의 소통 능력이 아닐까.
이에 대해 체찰사 이원익은 어떤 답장을 보냈을까.

논리적이면서도 애틋한 편지에 감동받은 그는 에둘러 휴가를 허락해준다.


<영혼을 매료시킨 감성적 소통의 대가, 이순신>중에서



이순신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로 손꼽히거니와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그가 일가친척과 주고받은 사적인 편지뿐만 아니라 조정의 임금이나 신하들과

주고받은 공적인 편지에서도 시적이고 감성적인 소통 능력이 잘 드러난다.

이 책에서 영혼을 매료시키고 열악한 상황에서도 백전백승의 기록을 세운

 이순신의 특별한 소통 능력을 자세히 만나볼 수 있다.




퇴계는 첫 부인과 사별하고 서른 살에 권질의 딸 안동권씨를 재취로 맞이했는데,

그녀는 지적장애를 가진 여인이었다. 전해오는 말로는 당시 안동으로 귀양 온 권질이 찾아와

과년한 딸이 정신이 혼미하여 아직까지 출가하지 못했다면서 아내로 받아줄 것을 청하자,

퇴계는 별다른 거리낌 없이 승낙했다고 한다. 자신의 인품을 믿고 과년한 딸을 부탁했는데

거절하는 것은 예가 아니요, 당시엔 장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 의식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엔 장애에 대한 편견이 그리 크지 않아서 장애 여성과의 결혼을 심하게 꺼리지는 않았다.

 단적인 예로 퇴계는 자신뿐 아니라 애제자 서해도 시각장애인 여성과 결혼하도록 중매했다.
지적장애인인 권씨는 자주 실수를 저질렀다. 제사상을 차리던 도중 상 위에 떨어진 배를 집어 치마 속에 감추었다거나,

흰 상복을 다리던 도중 잘못하여 구멍이 나자 붉은 천을 대고 기워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럼에도 퇴계는 항상 권씨를 공경히 대하며 원만한 부부생활을 했다.


 <살림하는 남자, 퇴계 이황>중에서


  위 글의 내용은 익히 많이 알려진 내용으로 퇴계의 인간됨을 얘기할 때 많이 인용되기도 한다.

조선 중기까지는 여성이나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나 편견이 없었던 듯하다.

이 책에서는 그 외에도 퇴계이황의 깐깐해 보이는 초상화에 빗대어 꼼꼼하게 살림살이에 관여함과

자녀교육에 있어 극성스러움을 보이는 평범하면서도 깐깐한 이미지를 설명 해 주고 있다.



큰아이에게
너의 첫 편지에서는태어난 아이가 얼굴이 수려하다고 했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차츰 충실해지는데 그 사람됨이 평범치 않다라고 했으며,

네 동생 종채의 편지에서는 골상이 비범하다고 했다.

대저 이마가 툭 튀어나왔다던지 모가 졌다던지, 정수리가 평평하다던지 둥글다던지 하는 식으로

왜 일일이 적어 보내지 않는 거냐? 궁금하다.

이전에 보낸 쇠고기 장조림은 잘 받아서 아침저녁 반찬으로 먹고 있니?

왜 한 번도 좋은지 나쁜지 말이 없니? 무심하다, 무심해.

나는 그게 포첩(脯貼: 말린 고기)이나 장조림 같은 반찬보다 나은 듯하더라.

고추장 또한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맛이 좋은지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면

앞으로도 계속 두 가지를 인편에 보내든지 말든지 하겠다. ”
 
연암은 손자의 모습이 몹시 궁금한 듯 이마와 정수리 등

아기의 생김새에 대해 자세히 적어 보내달라고 재촉하고 있다.

사진이 없던 시절의 재미있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그는 얼마 전에도 쇠고기 장조림과 고추장 같은 밑반찬을 직접 만들어서 자식들에게 보내준 듯하다.

그런데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아무런 말이 없으니 연암은무심하다, 무심해라고 하면서 섭섭해한다.

자식들의 사랑을 받고 싶어 투덜거리는 모습이 살짝 귀엽기까지 하다.
이와 같이 연암은 부인 사후 20여 년을 홀로 지내면서 자식들에게 어머니 역할까지 다하고자 했다.

손수 고추장이나 장조림을 만들어 보내고, 옷을 지어 보내준 며느리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현하며,

며느리의 출산과 산후조리를 챙기기도 했다.

자식교육에 있어서도 그는 무조건 강요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과거시험 역시 반드시 합격해서 입신출세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자식의 선택을 중시했던 것이다.
연암은 아무리 자식이라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했다.‘~하지 않겠니?’라고 권유하거나

 ‘~하면 좋겠다라고 부탁하는 등 매우 부드럽게 소통하고 있다.

 아울러 웃을 일이다, 웃을 일이야!”, “무심하다, 무심해”, “어쩌겠니, 어쩌겠어!”라고 하면서

재치와 유머까지 보여주었다. 연암은 과연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존경받는 아버지, 연암 박지원> 중에서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를 보면 눈매가 위로 찢어지고 덩치가 커 상당히 호방해 보이고

상남자(?)같은 이미지인데 참으로 의외의 성품을 보여주고 있는 편지들이었다.

강직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와 지고지순한 남편의 모습에 고추장은 물론 밑반찬까지 만드는

요즘 말로하면 그야말로 요섹남이다.^^



" 평민으로 배우지 않으면 못난 사람이 되고 말지만,

폐족으로서 배우지 않는다면 마침내는 도리에 어긋나고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게 되고 아무도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아 결국 세상의 버림을 받게 되고

혼인할 길마저 막혀 천한 집안과 결혼을 할 것이며, 물고기의 입술이나 강아지의 이마 몰골을

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집안은 영영 끝장나는 것이다."


다산은 무엇보다 가문 회복을 위해 자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특히 '문전의 잡객, 시중드는 하인이나 아전', '비천한고 더러운 신분', '천한 집안'이라고 표현하면서

노골적으로 신분의식과 가문의식을 자식들에게 주입하고 있다.

그가 과연 젊은 시절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서학에 빠지고,

실학을 연구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는 서학이나 실학을 실천적 측면이 아닌 이념적.학문적으로만 공부했다는 것이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첩을 얻어 딸 홍임이를 낳았는데,

해배되어 돌아갈 때에는 그들을 두고 혼자 떠나갔다.

첩은 다산초당에서 홀로 아이를 기르며 살았다고 한다.

다산은 초당의 주인인 윤씨에게 편지를 보내 홍임이 모녀를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하고는 내내 모른 척했다. 해배 후 2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그는

단 한 번만이라도 홍임이 모녀를 찾아가 볼 순 없었을까? 

.  

<엄격하고 깐깐한 아버지, 다산 정약용>중에서


다산 정약용의 편지에서는 의외의 내용에 적잖이 갸웃하였다.

평소 다산 정약용에 대해 알고 있었던 생각이나 이미지와는 너무 많이 다른 글들은

역사책에서든 어디에서든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더우기나 유배지라는 힘든 상황에서 18년 동안이나 함께 했던

첩과 딸을 내 몰라라 했다는 것이 암만 생각해도 도리가 아닌 듯하여 불편하다.


 
신천강씨의 한글 편지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남편 김훈이 첩을 얻은 후 생긴 치열한 부부싸움이다.

16세기인 조선 중기만 해도 여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에

남편의 첩에 대해 아내들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치열한 부부싸움을 벌였다.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정착한 조선 후기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던 것이다.

신천강씨의 한글 편지에는 첩을 두고자 하는 남편에게 맹렬히 반발하는 부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의원이 말하되마음을 편히 먹지 않으면 이 병이 중하게 되고,

마음에 용심만 없으면 1년 내로 약을 장복하면 좋으시겠다하니,

용심이 없게 너희 아버님이 잘 건사하기를 바란다.

지극하게 하면 그년을 버릴 법도 하거니와, 그렇다고 음악하고 술 먹는 년이니

 데리고서 술과 음악을 하고 종일 꽃밭에서 있으니,

나야 이미 박절하게 되니 죽는다고 한들 생각이나 하겠느냐?

다만 자식들이 가자면 그리하여 볼 것이다. 예전에도 첩들을 경험하였지만,

이제는 내가 아주 좋지 않게 되니 이렇게 서러워 다 못 쓰겠구나.”
 
신천강씨의 답장은 아주 당당하고 솔직하다. 자신의 병은 용심 때문에 생긴 것인데,

그것을 없애는 방법은 남편이 처신을 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술과 음악을 하는 기생첩을 포기하면 금방 나을 병이라는 것이다.

또 김훈은 과거에도 첩을 들이려 한 적이 있다고 폭로하고 있다.


<노부부의 사랑과 전쟁, 신천강씨>중에서


위 편지는 신천강씨가 딸에게 보낸 것이다.

엄마가 딸에게 온갖 한탄을 다 하고 있다. 질투의 적나라함까지....

요즘 세상 같으면 뭘 그걸 일일이 딸에게 한탄을 할까 싶기도 한데

울어머니 세대까지만 해도 다들 그리 사시지 않았을까 싶다.

딸이 중간에서 참으로 애달팠을 듯하다.^^




적대관계의 신하와 나눈 정조의 솔직한 편지

조선시대 공처가 나신걸의 최초 한글편지

백전백승 장수 이순신 장군의  감성적인 편지

남편이 스승이라 여겼던 강정일당의 멘토편지 
솔선수범을 보였던 아버지 연암 박지원의 아빠사랑 편지

상상 그 이상의 혹독한 정약용의 아들훈육편지

그들은 어떻게 편지로 소통하였는지

어떤 것이 불통을 만들었는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