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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순 - 미술관 옆 인문학

#경린 2018. 11. 9. 22:00

박홍순 <미술관 옆 인문학>을 읽다가 맘 가는 부분이 있어 옮겨 보았습니다.


꽃 운반 노동자 - 디에고 리베라, 1947


세계적인 민중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 '꽃 운반 노동자'를 보면 거의 사람 키만 한 거대한 꽃바구니 안에 화사한 분홍색 꽃이 가득하다. 그 거대한 꽃바구니를 폭이 넓은 끈으로 둘러 상체에 지고 있는 남성이 보인다. 꽃을 나르는 일에 지쳤는지, 아니면 보기와는 다르게 무거운지 버거운 듯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남성은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서 표정이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노동에 찌든 모습 그대로일 것 같다. 지금 그에게 꽃은 아름답고 귀한 무엇이 아니라 단지 버거운 '짐'일 뿐이다.


꽃 노점상 - 디에고 리베라, 1935


꽃과 사람은 어떻게 연결이 될까? 꽃과 노동자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될까? 아마 꽃은 몇 가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여성이 연결될 것이다. 서양화에서든 동양화에서든 여성이 꽃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대한 꽃바구니를 힘겹게 들어 올리는 여성이 등장하는 그림에는 바구니 밑으로 투박한 발의 모습이 보인다. 꽃 위쪽에서 살짝 드러나는 대머리는 도와주는 남성의 것이다. 어깨에 둘러맨 끈이 여성을 졸라매는 듯이 팽팽하다. 있는 힘을 다해서 들어 올리려 애쓰는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인지 꽃이 그다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여인을 괴롭히는 괴물처럼 느껴지기조차 한다. 여자는 이 꽃을 지고 어느 길가에 앉아 꽃을 사줄 손님을 하염없이 기다릴 것이다.


작가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가지고 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어떻게 강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인 자본이 처음에 축적되는 과정은 생산자를 생산수단과 분리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원래 농민은 토지에 대한 일정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강제로 박탈당하면서 어떠한  생산수단도 소유하지 못한 존재로 전략해 버렸다. 이를 통해 자신의 노동력 말고는 판매할 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노동자가 탄생한 것이다. 자본주의 발생과 더불어 탄생한 노동자에게 있어서 노동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강제였던 것이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법적으로 강제노동은 사라졌다. 적어도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량 실업이 만성화된 현대사회에서 임금과 노동조건의 칼자루는 일방적으로 기업이 쥐고 있다.


진정으로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은 불가능한가? 노동이 즐거움이자 자기 성취일 수는 없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탐욕만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찾는 것은 공상에 불과할까? 꽃이 아름다운 것처럼 꽃을 나르는 노동도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린다.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장식하며 아름다움의 상징인 꽃이 노동자의 등을 짓누르는 짐으로 지어져 있으니 그 고단함과 슬픔이 배가 되는 듯합니다. 특히 '꽃 노점상' 그림을 보노라면 그 슬픔은 더욱 커집니다. 여자가 짊어지고 있는 꽃은 카라로 카라꽃은 크고 당당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입니다. 한 송이만으로도 신부의 부케가 되기도 하는 우아한 꽃은 무리를 지어 더욱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반면 그것을 짊어지는 여인의 모습은 삶의 무게를 감당 해 내느라 강인 해 보이지만 살아내기 위한 힘겨움이 보입니다. 꽃과 노동자의 모습은 누군가의 행복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으로 서로 대조되는 모습이라 더욱 더 큰 고통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활동이자 보편적인 삶의 활동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노동과 분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노동은 생계의 수단이기도 하고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노동이 억압과 고통, 착취가 아닌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본질적 행위로 모든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활동인 것입니다.

 

노동이 꽃 피우고 노동이 아름다울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올 수 있을까요?

 




아기의 목욕 시간 - 캐사트, 1893


엄마가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 발을 씻어 주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아기는 자신의 허리를 두른 엄마의 왼팔에 살짝 기댄 채 왼팔로 엄마의 무릎을 잡고 의지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냥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평화롭고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침대에서의 아침 식사 - 캐사트, 1897


엄마와 아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직후의 모습이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은 아침의 허기를 달래고 만족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아침 식사도 했으니 엄마와 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나른해 보인다. 푹신한 베게에 머리를 깊이 묻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고 있지만 아직은 눈꼬리에서 잠이 묻어난다. 아이가 뒤척대는 바람에 잠을 설친 모양인지 어딘가 조금은 푸석하게 부어 있는 듯하다. 이래저래 아기의 희망과는 다르게 잠자리에서 바로 벌떡 일어날 자세가 아니다. 아기가 침대 모서리에서 놀다 혹시라도 밑으로 떨어질세라 아기의 허를 두른 두 팔을 모아 잡고 있다. 아기는 안심을 하고 발을 겹쳐 앉아서 까딱까딱 발가락 장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엄마의 두 팔과 아기의 팔, 다리가 조그만 공간 속에서 어우러지면서 아기자기하게 정감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작가는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와 아드리엔느 리치의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에서 지적하고 있는 가족 내 분업의 억압성과 여성이 담당해야 하는 노동의 무게에 대해 얘기를 합니다.


마르크스는 가족 내의 분업과 소유 관계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규정한다. 남성이 주로 밖의 일을 담당하고 여성이 출산과 육아, 가사를 담당하는 식의 노동 분업은 남성의 여성과 자식에 대한 소유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농경과 목축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형성된 잉여생산물에 대한 사적 소유가 성립하면서 남성에 의한 배타적 소유가 정당화된다. 그 일환으로 여성과 자녀에 대한 소유가 성립하고 여성에게 가정 내에서의 분업이 강제된 것으로 바로 가부장제 가족이다.


여성들이 육아와 가사와 같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통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다. 정신적인 부담도 그에 못지않다. 미국에서 여성 문제에 대해 많은 발언을 하고 있는 아드리엔느 리치는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에서, 자녀를 둔 여성이 담당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지게 되는 정신적 부담이 어떠한 사회적 부담보다도 무겁다는 점을 강조한다. 강제 노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관이나 주인을 미워하거나 두려워하고, 하는 일을 싫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훨씬 더 복잡하고 파괴적인 감정의 희생자가 된다고 지적한다.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할 수 있다.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가정에 갇혀 분열되어 있으며, 감정적인 유대에 의하여 자녀에게 구속되어 있다.


검은색 글 출처 : 박홍순의 <미술관 옆 인문학>에서 가져 와 재구성


어머니 또는 전업주부를 서로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사회적 분업'과 동일한 작업장 내부에서 서로 다른 업무에 종사하는 '기술적 분업'의 형태 중 어디에다 두어야 할까요? 둘 다에 해당되는 듯도 합니다. 여성이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집안일을 도맡아하고 자녀양육 또한 전적으로 책임지고 하다 보니 가정 일에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그러하니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도 여성에게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잘 된 일은 각자의 잘남이거나 서로 잘해서라고 하지만 잘못 된 일은 그 책임을 가정 일을 전담하는 어머니에게로 향합니다. 육체적 노동도 노동이지만 정신적 노동의 크기가 엄청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업주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능력이 퇴화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비단 전업주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깥일을 하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 역시 어머니이고 아내이니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히려 전업주부처럼 전적으로 가정에 충실할 수 없는 죄책감 같은 것이 더 얹어지기도 합니다. 또한 사회에서의 능력 발휘에서도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보니 지장을 받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왜 하냐고 되묻는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비율이 더 높다고 하는데, 이래저래 살기 어려운 경제적 사회적 상황도 있겠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출산과 육아, 그리고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가족관계의 유대가 가져오는 무게가 크기 때문입니다. 인구 마이너스 상태에서 출산은 둘째 치고 결혼조차 하지 않겠다고 하니 보통일이 아닌 것입니다.

 

예전에는 철저하게 분업화 되었던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현대로 오면서 경계가 허물어져 가고 있다지만 아직까지는 여성이 담당해야하는 부분의 무게가 훨씬 더 큰 것이 사실입니다. 현시대는 외벌이로 살기에는 힘든 세상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능력을 퇴화시켜 버리고 묻어 버리기에는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나아가 세계를 이끌어가는 힘의 원동력으로도 손해인 것이 확실합니다.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전 세계를 공산주의 사회로 통합하려고 했던 마르크스의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는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현 지구상엔 구현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작은 공동체인 가족 내에서만이라도 제대로 실현이 된다면 젊은이들이 동등한 인격체로 결혼을 하여 서로서로를 아끼고 위하며 의지하고 살아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삶의 기본이며 터전이 되는 사회적 경제적 노동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꽃 피울 수 있도록 제도적인 마련도 뒷받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