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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경린 2018. 11. 28. 15:40



후설이 철학을 연구하며 평생의 과제로 삼았던 것은 철학을 모든 개별 학문의 이론적인 토대가 될 수 있도록 개혁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후설은 철학이 모든 개별 학문들의 토대 학문이 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현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후설의 제자로 현상학에 심취하였던 하이데거가 집중했던 것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일이었으며, 의식의 주어진 것 만을 다루려는 스승과는 달리 의식에 주어지지 않은 것을 다루려고 하여 스승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기도 하였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란 무엇일까요?

 

하이데거는 종래의 철학이나 후설이 말하는 존재를 '존재'와 '존재자'로 분리하여 생각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대상은 다 존재자 즉, ‘있는 것’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자들이 ‘있는 것’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이데거 이전 철학에서는 ‘존재자’를 ‘존재'로 보고 존재이게 해 주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데거에게 있어 '존재'를 '존재자'로 보는 것은 결국 존재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접근 방식으로 존재를 은폐시켜 존재의 문제를 잘못 다루어 왔다는 사실이 철학의 가장 큰 문제였다고 지적합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드러난 존재자를 통해서 우리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것은 비은폐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http://blog.daum.net/deersunny/2388

'존재자'와 '존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하이데거의 '고흐의 낡은 구두 한켤레'에 대한 해석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의 예를 끌고 들어와 설명 해 주고 있어 이해하기 힘들었던 현상학과 많이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그러나 감각적 경험에 관계나 가치 등 비감각적 자료로 직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허용한다는 현상학적 접근방식은 이해가 되는데 후설의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대상을 모두 볼 수 있는 제3의 관점 즉 선험적 관점이 칸트의 선험적 지식과도 연결이 되는 듯하면서 그것이 가능한지? 정확히 어떤 상태일까?하는 의문이 갑니다.


후설은 의식의 지향성에서 의식과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며 의식과 대상은 언제나 함께하는 동반자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 어느 것을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않는 의식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일부만 보고 나머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공감을 합니다.

 

후설은 존재를 어떤 것으로 즉 존재를 존재자로 보는 것은 존재를 은폐하는 것으로 보았고, 하이데거는 존재는 결코 어떤 것이 아닌 것으로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은 존재자이고 이 존재자를 통해 존재를 나타내주는 비은폐성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이데거의 이론은 현재 여기 있는 나는 존재자이고 이 존재자를 통해 보여 지는 존재는 끊임없이 어떤 상황 속에서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현존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를 탐구하라는 메시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스승 후설과 제자 하이데거는 같은 현상학을 연구하였지만 중요한 포인트에서 의미를 달리하는 것이 마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데아와 형상을 관념과 감각의 세계로 구분 한 플라톤의 이원론과 질료와 형상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며 스승의 이원론 사상을 비판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제자의 질료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플라톤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실존주의 철학의 대부라고 부르지만 그것을 거부한 하이데거는 자신을 존재론자라고 칭했습니다. 존재자에 대한 탐구에만 머물던 종래의 철학에서 탈피 해 존재곧 존재 자체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고 존재라는 말이 포함 되는 개념을 100개 이상 새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존재, 존재의 울림, 세계 내 존재, 에라이그니스...) 실존주의는 실존과 자아를 중시하고 존재자의 본질을 부정하여 존재자를 존재로 보았지만, 하이데거는 실존론적 존재론으로 존재자의 본질을 연구하여 존재라는 개념자체를 분석할 수 있다고 봄으로서 존재자의 본질을 인정하였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존재와 시간> <시간과 존재>에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의미시간성을 통해 밝히며 그에 기초 해 존재 일반의 의미를 시간으로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찾게 되는 것은 사랑’ ‘행복이고 죽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순리메카니즘으로 영원히 산다면 시간이라는 개념을 자각하지 못하나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때 최선을 다합니다. 삶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 나는 누구인가?“를 알면 막 살지 않게 됩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하지만 영원히 산다면 희망, 계획, 꿈이라는 것이 존재 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미래가 있기 때문에 현존재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며 존재의 의미, 목적, 방향성을 알아 불안을 극복하고 희망, 계획, 꿈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현존재로서 실존하는 내가 사랑과 행복을 찾기 위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긍정하면서 누군가의 힘이 되어 주고 죽음을 통해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계 내 존재로 던져 진 ’, ‘나는 누구지?’, ' 어떻게 살았지?’,  '나는 어떻게 아야 하지?’,  '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지?’,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현재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의문을 던지고 찾아가며 현존재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아름다웠다고, 행복하였다고 말할 수 있기를 진정 바램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