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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 장 그르니에

#경린 2018. 12. 24. 06:00

 

두껍지 않고 작은 책 '섬'

하지만 그 가지고 있는 내공의 크기는 책 사이즈와는 반비례함이었습니다.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 영감>을 읽은 뒤 그의 책을 더 읽어 보고 싶었습니다.

책이 배달되어 오고  설레임으로 연 첫 시작 페이지에서 만난 알베르 카뮈의 글은

 둥둥 떨림으로 이어졌습니다.


알제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받은 충격, 이 책이 내게, 그리고 나의 많은 친구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오직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한 세대에 끼친 충격 이외에는 비길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알베르 카뮈-


<섬>에 대한 후기 같은 알베르 카뮈의 추천글은 감동으로 물든 그의 얼굴을 그리기에 어렵지 않았고

반쯤 벌린 입을 하고 신기한 듯 궁금한 눈으로 한참을 쫓게 하였습니다.

어떤 글이 오도마니 웅크리고 있을까? 사뭇 아니 궁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쉬이 책장을 넘기지를 못했습니다.

왠지 이어지는 장 그르니에의 글은 시간을 내어 제대로 읽어야 하겠다는 무슨 사명과도 같은

그런 맘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작은 책을 며칠동안 가방에  내내 그냥 넣고 다니며

가방을 열고 닫을 때마다 책 표지만 보고 다시 넣어 두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심호흡하며 읽기 시작.....얇은 책이라 맘만 먹으면 아마도 몇 시간이면

금방 읽을 수도 있는 분량이었지만 그리 호락 책장이 쉬이 넘어 가지 만은 않았습니다.

일상을 담담히 그리고 서정적으로 펼쳐 나가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내공으로 이어지는 글들을 따라 상념은 오랫동안 머무르며 뇌리로 파고 드는대로 음미도 하였지만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눈으로 들어왔던 활자가 잠시도 망설임 없이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에서 철학교수를 지낸 장 그르니에는 지중해의 여기저기 떠 있는 섬과 사람들의 일상을

 철학적 사유로, 담담한(? 좀은 난해한^^) 에세이로, 시적 영감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 물루와의 추억, 작은 해변도시에서의 일상, 지중해 무덤에서 느끼는 것들,

인도사상에 대한 공감 등 그의 삶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섬세한 감수성과 철학적 사유로 표현한

글에서 느껴지는 해탈과 초월의 경험을 따라 가는 길은 그의 곁을 따르는 서성임의 시간을 안겨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공간이 어쩌면 섬과 섬으로 이어지는 것일 듯하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책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 섬에서 저 섬으로 거닐며 우리는 여행을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요한 침묵 속 마주하게 되는 풍경 속에서 가만히 저 자신과 만나 차 한 잔하고 돌아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겨울 숲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 보내고

그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거나,

무.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 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그 뒤에 오는 적막함, 혹은 환청, 돌연한 향기,

그리고는 어둠, 혹은 무, 그 속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 산문집을 번역했다.

그러나 전혀 결이 다른 언어로 씌어진 말만이 아니라 그 말들이 더욱 감동적으로 만드는 침묵을 어떻게 옮기면 좋단 말인가?


- 옮긴 이 김화영의 글 중에서-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있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더라도, 목적 없이 읽고 싶은 한 두 페이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수 많은 책들을 꺼내서 쌓기만 하는 고독한 밤을 어떤 사람들은 알 것이다. 

 지식을 넓히거나 지혜를 얻거나 교훈을 찾는 따위의 목적들마저 잠재워지는 고요한 시간,

우리가 막연히 읽고 싶은 글, 천천히 되풀이하여, 그리고 몽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몇 페이지란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들 마음 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 장 그르니에 <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