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세계

뒷모습의 방랑자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경린 2018. 12. 14. 12:06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 어디로 가나 길 끝에는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서쪽으로 가면 해안선이 복잡하지만 햇살을 통해 보이는 염전은 은거울처럼 반짝이며 눈부시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 다도해의 작은 섬들이 바다와 하나 된 장관을 관조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도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도 없다. 쪽빛 바다 위로 튀어 오르는 순간 자신의 빛을 잃고 검은 돌이 된 제주의 숨구멍을 무시로 간질이는 하얀 모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끝없이 걸어온다. 제주만이 보여주는 오묘한 풍경 앞에서 우리는 그저 눈을 감고 풍경을 품어 기억 속에 넣어 둔다. 돌아 온 뒤 풍경이 없어도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감사하게 된다. 단조로움을 따라 이어지는 같은 듯 다른 풍경이 눈 닿을 곳이 어딘지 모를 끝없음으로 펼쳐지는 동쪽 해안선. 인간의 어리석음을 꾸짖듯 걷잡을 수 없는 화냄으로 소용돌이치다가도 고뇌와 번뇌는 다 두고 가라고 깊은 품을 내어준다. 수많은 아름다운 바다 중에서도 동해에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던 문무왕의 대왕암을 품은 동쪽 바다는 잊히지 않는 바다이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 동해 어귀 큰 바위 앞에 서면 신령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바다에는 우리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날씨 좋은 날에는 아리도록 시린 쪽빛 바다, 일출로 물드는 황금빛 희망, 섬과 바위가 만들어 내는 낙조의 안식, 물안개 피어오르는 날 안개바다를 헤치고 오는 만선의 고동소리와 그 뒤를 따르는 갈매기 떼들이 펼치는 몽환적 아름다움, 얄궂은 날에는 하얀 거품이 세상을 다 삼켜 버릴 듯 거친 파도 등 세상 온갖 풍파를 다 받아 내고 있는 모습에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그림이 겹쳐진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광고나 영화 등에 많이 패러디 되면서 그림을 그린 화가보다 그림이 먼저 알려 진 작품이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94.8 X 74.8, 함부르크 아트센터



우뚝 선 바위 꼭대기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과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바다에는 바다의 모습을 감추듯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바다 위를 숨 막히게 덮은 안개를 춤추게 하는 바람에 금발을 흩날리며 남자는 저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가파른 벼랑에 서서 발아래로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도 하고, 그 바다를 덮은 안개를 흔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안개 너머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는 듯도 하다. 그림 속 남자가 응시하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을 보는 이들은 그림 속 남자의 안내로 그와 같은 시선으로 그의 어깨 너머의 바다 저편 어딘가를 함께 바라보게 된다.

 

프리드리히는 독일 낭만주의를 이끌어갔던 대표 예술가로 뒷모습의 인물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킬 정도로 관람자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인물을 많이 그렸다. ‘뒷모습의 인물들은 관람객이 그림 속의 인물들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그의 작품은 뒷모습의 인물이 향하는 시선의 방향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이끌어 그림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고 들어간다.

 

비평가 가디스(Gaddis, 2004)는 벼랑 끝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방랑자의 모습은 광대한 절경과 대비를 이루면서 인간의 보잘 것 없음과 하찮음이 극대화 되고 있다고 평하였다. 반면 남자의 뒷모습을 통해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다른 해석도 있다. 그림을 통해 보여 지는 안개 속에 묻힌 풍경은 알 수 없는 미래로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고 더욱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하기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전자도 후자도 펼쳐지는 풍경 속에 신앙과 명상에 대한 메타포(상징)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으로 시선이 가는 순간 고독한 공허가 가득 메워진다.



 달을 바라보는 두 남자, 1819, 44X35, 드레스덴 국립미술관


프리드리히의 풍경화에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두 남자의 뒷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자신이고 그 옆의 한 사람은 그의 제자 오귀스트 하인리히의 모습이다. 하인리히는 오랫동안 프리드리히의 화실에서 같이 일했고 늘상 둘은 붙어 다닐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던 중 하인리히가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고로 죽게 된다. 프리드리히는 그를 잃은 슬픔과 고독을 그림으로 승화시켜 그를 그림 속에 살게 한다. 함께 할 수 없지만 함께 하듯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같은 길을 거닐며 그림 속에서 가까운 듯 먼 듯 그렇게 함께 하고 있다. 두 사람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프리드리히가 있는 이 세상의 풍경일까 하인리히가 있는 저 세상의 풍경일까? 그의 낭만적 감정은 하인리히를 만나러 저 세상으로 건너 가 있다. 하지만 그에게 저 세상은 하인리히의 죽음 그 이전부터 가까이 있었다. 1774년 발틱 해안가에 있던 작은 마을 그라이프스발트의 엄격한 프로테스탄트교(개신교)도 가정에서 그는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프리드리히가 7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일 년 후에는 그의 누이 엘리자베트가 죽었다. 13살이 되던 해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동생 크리스토퍼가 얼음이 언 호수에 빠져서 익사하는 사건은 무엇보다도 커다란 비극이었다. 두 번째 누이인 마리아는 1791년 발진티푸스로 사망한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사랑하는 가족들과 영원한 이별을 고해야하는 슬픔을 겪었다. 여기에 북독일 특유의 우울한 정서는 자살을 시도 할 정도로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이러한 감정의 혼란은 자연의 풍경 속에서 어떤 정신적 위안이나 신적인 영역의 영감을 주었던 듯하다. 그의 그림에서는 인생의 덧없는 부질없음과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분위기를 쉬이 만날 수 있지만 그 한가운데서도 항상 빛이 스며 들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종교적 신앙으로 구원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듯 주위의 풍경을 은은하게 뒤덮는다. 어떻게 보면 저 세상은 그의 사랑하는 이들이 먼저 가 있는 사랑이 존재하는 곳으로 그 곳과의 연결은 삶을 초월하는 영혼의 상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들과 함께 시간과 장소를 넘어 오랫동안 함께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졌을 듯하다.



범선 위에서, 1818, 71X56, 에르미타주 미술관


범선 위에서를 그릴 시기의 그의 그림은 많이 밝아진 모습이다. 1818년은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14년 째 되는 해이기도 하고,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카롤리네 봄머와 결혼한 해이기도 하다. 범선의 뱃머리에 함께 앉은 남자와 여자는 프리드리히와 그의 아내 인 듯하다. 마흔 네 살의 노총각 딱지를 벗게 해 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저 멀리 미래를 열어 줄 미지의 풍경을 향내 나아가고 있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역시 1818년의 작품임을 감안하고 다시 봐 보자. 방랑자는 미지의 세계를 두루 여행하기 위해 가정이 주는 안락한 행복을 포기한 사람이다. 그런 그의 인생에 날아 든 사랑하는 여인과 새로운 세계는 어쩌면 그에게 새롭게 펼쳐지며 헤치고 나가야 할 미지의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창가의 여인, 1822, 37X44, 베를린 네셔널 갤러리


아내에 대한 사랑은 창가의 여인에서도 보여 진다.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는 여인은 아내 봄머이다. 남편의 스튜디오에 들렀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엘브강과 그 위를 지나는 배를 바라보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여린 연두 빛의 나무들은 프리드리히와 그녀를 지나는 세월처럼 독일 북구의 긴 겨울을 지나고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는 계절임을 보여 준다. 창가에 기대어 뒤로 엉덩이를 살짝 내민 여인의 뒤태에서 귀여운 봄 향기가 피어나는 듯도 하고 봄을 맞이하는 설레임이 느껴지기도 한다. 살짝 고독함도 있는가? 어두운 실내에서 밝은 밖을 보는 여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남편이 돌아오는 발소리를 기다리며 지나가는 범선의 돗대에 눈을 주고 있을까? 저 배는 어디로 가는 배일까 갸웃한 궁금증이 뒤태에 보이기도 한다.


달을 바라보는 연인, 1830~35, 44X34, 베를린 네셔널 갤러리


그가 젊은 시절 그린 달을 바라보는 두 남자를 말년에 다시 그린다. 동일한 풍경에 그의 제자 하인리히를 지우고 그의 아내를 그려 넣어 달을 바라보는 연인’으로 다시 그렸다. 물론 이 그림에서도 연인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이다. 프리드리히는 예순을 넘은 나이에 병을 앓고 있던 중이었다. 인생의 한 계절을 보내고 나서 같은 주제로 그린 그림에서는 아내의 뒷모습으로 바꾸었음에도 그림 전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노목은 뿌리째 뽑혀져 쓰러져 가고 있고 그 옆의 바위도 넘어 질 듯 위태롭다. 하지만 연인의 뒷모습은 다정함이 묻어난다. 여인은 남자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고 있다. 그들이 맞이하려는 미래를 바라보듯 기울어 가는 초승달이 발하는 빛을 관조하는 뒷모습에서 평온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늦가을 숲, 1835, 44X33, 앙거 박물관



1835년 뇌졸증으로 쓰러진 그는 작품 활동을 계속 할 수 없었다. 말년의 그의 작품 늦가을 숲’의 나무들은 그의 육신처럼 늙어 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미술에 대한 동경으로 사로 잡혀 있던 시기에 독일다운 풍경을 포착해 내어 진정으로 독일다운 풍경화를 고집 하였던 화가는 낭만주의가 시들해지자 미술계에서 잊혀져 쓸쓸하게 인생을 마쳤다. 그의 명성은 표현주의자들이나 상징주의 장르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재평가 받으며 부활되는 듯했으나 나치가 좋아했던 작품으로 낙인찍히면서 두 번째의 몰락을 겪기도 하였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1774년 9월 5일 ~ 1840년 5월 7일)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의 거장으로 독일인들이 가장 아끼는 화가들 중 한 명으로 우뚝 선 프리드리히. 그는 왜 많은 작품에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려 넣었을까? 마음속의 감정이나 정서의 심리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뒷모습은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다고도 한다. 그 뒷모습이 걸어오는 다양한 말을 따라 관람자들도 저마다의 언어로 세상을 관조하며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뒷모습은 사람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으나 앞모습보다는 더 진실 되고 가식적이지 않다. 그는 그런 뒷모습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진실로 나타내고 싶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