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세계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 따뜻한 곳에 묻어둔다.

#경린 2019. 1. 3. 13:00

렘브란트 자화상, 1640년 전성기의 모습, 80X102, 런던 국립미술관



렘브란트의 세 여인 사스키아, 헤이르체, 헨드리케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로 꼽히는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반 레인(1606~1669)에게는 그의 삶과 희노애락을 함께 했던 세 여인이 있었다. 사스키아 반 아위렌비르흐는 1634년 렘브란트와 결혼한 여인이다. 6살 연하로 착하고, 예쁘고, 귀족가문의 재력까지 갖춘 여인이었다. 그러나 몸이 허약하였는지 1636년에는 첫아들, 1638년과 1640년에는 딸아이들을 낳았지만 차례로 다 잃는다. 1641년에 다시 아들 티투스가 태어났으나 다음해 사스키아는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헤이르체 디르크는 네덜란드 선상 나팔수의 아내였다가 과부가 된 여인으로, 아들 티투스의 보모로 들어 왔다가 렘브란트와 연인의 관계가 된 사이였다. 이 와중에 렘브란트에게는 스무 살이나 어린 또 다른 연인이 있었으니 헨드리케 스토펠스라는 그의 그림모델이자 가정부인 여인이었다. 사스키아가 죽으면서 막대한 유산을 남겼으나 렘브란트가 재혼을 할 경우 유산은 무효가 된다는 조건이 붙자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이들의 삼각관계는 당시의 보수적인 네덜란드 청교도 사회에서 간음으로 지탄의 대상이었으며 씹어대기 좋은 가십거리였다. 헤이르체는 렘브란트가 헨드리케와 사랑에 빠져 자신을 버리자 1649년 혼인 불이행으로 렘브란트를 고소한다. 종교 재판소의 소환을 피해갈 수 없었으며 렘브란트를 대신하여 미혼인 헨드리케가 대리 출석으로 법정에 서며 삼각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후 렘브란트는 헤이르체의 오빠와 타협 해 그녀를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뒤 그녀는 렘브란트에게 보상금을 받으러 하였으나 그는 이미 파산위기에 처해 있었다. 렘브란트가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져 억울하기는 하였겠지만 그를 고소한다거나 보상금을 뜯어 내려고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헤이르체는 렘브란트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의 명성과 부를 사랑한 듯하다.



베일을 걸친 사스키아, 1633, 66.5X49.7, 암스테르담미술관


렘브란트가 헤이르체 디르크를

그렸다고 추정되는 그림

헨드리케 스토펠스, 1650, 60 X72, 파리 루브르박물관



헨드리케는 렘브란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1654년에 딸 코넬리아를 낳았다. 엄청난 수집광으로 씀씀이가 헤퍼 빚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사스키아의 묘까지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른 렘브란트가 1656년 결국 파산선고를 하자, 헨드리케는 회사를 설립하여 렘브란트의 그림을 판매하며 빚을 갚아주고 아들 티투스를 화가로 키워 낸다. 네덜란드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 공으로 그녀의 고향인 브레이드보르트의 잔느 광장에는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렘브란트의 악조건과 고통까지 사랑한 헨드리케는 1662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결혼도 해 주지 않는 남자에게 청춘을 다 바친 그녀의 사랑이 애달프지만 역시 여성의 사랑은 숭고하고 위대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렘브란트는 1668년 그의 버팀목이었던 사랑하는 아들 티투스마저 27세의 나이로 죽자, 그도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았는지 이듬해 10월 어린 딸을 남겨 둔 채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63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아카디아 의상을 입은 사스키아,  1635, 런던 내셔널갤러리

플로라 여신 사스키아, 1641, 98.5X82.5, 그레스덴미술관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 따뜻한 곳에 묻어둔다.


남자의 가슴에는 첫여인을 담아두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는 듯하다. 외롭고 춥지 않게 따땃하니 군불도 지펴주고 말갛게 명경알처럼 닦아 고이 묻어두다, 세상살이에 지치거나 힘들 때, 운수 좋아 신날 때 몰래몰래 살그머니 들여다보고 눈 맞추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렘브란트에게도 사스키아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에게는 젊음과 순정을 희생한 사랑하는 여인 헨드리케도 있었다.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도 많이 그렸고, ‘다나에작품에서는 먼저 그렸던 사스키아의 얼굴에 덧칠을 하고 헨드리케의 얼굴을 다시 그려 넣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슴 애틋한 사랑은 아무래도 그의 첫여인 사스키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꽃의 여신 플로라를 소재로 한 '아카디아 의상을 입은 사스키아에서 사스키아의 따뜻한 시선과 표정에서는 둘의 충만한 사랑이 느껴진다. 사스키아와의 결혼 생활동안 렘브란트는 화가로서 명성이 높아졌고 부도 많이 쌓았다. 사스키아를 모델로 그린 많은 그림 속 그녀는 진귀한 의상과 소품으로 잔뜩 치장하고 있다. 표정 또한 행복 그 자체이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641년 사스키아가 죽기 직전 그려진 플로라 여신 사스키아' 또한 꽃을 든 사스키아의 초상화이지만 앞의 작품에서 보여 지던 생기와 화려했던 치장이 사라졌다.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그녀는 삶에 지쳤지만 희미한 미소를 띠우며 가슴에 한 손을 얹고 이승과 저승으로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듯 붉은 꽃 한 송이를 내밀고 있다. 그 꽃을 받고 영원한 사랑을 함께 맹세 하였을까? 렘브란트는 평생 재혼을 하지 않았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무는 죽음 너머의 애틋한 사랑과 약속을 담은 그림에서는 말보다 더 진한 감동이 시가 되어 나폴나폴 우리 가슴속으로 날아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