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세계

'다나에' 다 나와!

#경린 2018. 12. 26. 00:08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 델포이 신전 현관에 쓰여 진 문구로 소크라테스가 인용하여 사용했던 말이다. 델포이 신전은 아폴론의 신탁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탁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신탁은 반드시 명료한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어서 전달하는 이, 받아들이는 이의 해석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신탁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애매모호성을 델포이 신전 현판 문구 너 자신을 알라가 말해 주는 듯하다. 너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신탁 때문에 비극적인 삶과 운명을 맞았던 이들이 있다. 다나에와 그녀의 아버지 아크리시오스 그리고 아들 페르세우스이다.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를 평화롭게 통치하던 아크리시오스 왕은 자신이 아들을 가질 수 없으며, 외손자에게 살해를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는다. 아크리시오스는 아직 결혼 하지 않은 딸 다나에를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청동탑에 가둔다. 하지만 다나에의 미모는 제우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바람둥이 신 제우스는 아름다운 다나에를 탐하기 위해 황금비로 변신한다. 청동탑 지붕 틈새로 스며들어 다나에와 사랑을 나누었고 사랑은 결실을 맺어 아크리시오스가 두려워하던 외손자 페르세우스가 태어난다. 제우스의 아들을 죽일 수 없었던 아크리시오스는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 던져 버린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제우스의 부탁을 받고 다나에 모자를 보호 해 주었고 세리포스 섬에 안착한다. 섬의 왕이었던 폴리덱테스는 다나에와 결혼하고 싶으나 방해가 되는 페르세우스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오라는 무리한 요구를 한다. 페르세우스는 아테나 여신과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아 메두사를 무찌르게 된다. 메두사의 머리를 본 폴리덱테스는 돌이 되었고 페르세우스는 다나에와 그의 아내를 데리고 고향인 아르고스로 돌아간다. 외손자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의 두려움에 아크리시오스는 라리사로 몸을 숨긴다. 외할아버지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페르세우스는 외할아버지를 찾아 라리사로 간다. 마침 라리사는 축제 기간이었고 페르세우스는 원반던지기 경기에 참가하게 된다. 그런데 페르세우스가 던진 원반은 바람의 힘에 의해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있던 노인에게로 향했고 원반을 정통으로 맞은 노인은 죽고 만다. 그 노인은 아크리시오스였다. 운명을 피할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를 제대로 알았다면 이런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마뷔즈, 1527, 다나에, 95X113.5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비극적인 다나에의 신화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로 표현되어졌는데 특히 많은 화가들의 그림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신화의 내용 중 다나에와 제우스가 사랑을 나누는 '황금소나기가 다나에의 벌린 두 다리 사이에 걸친 베일에 떨어진다'로 묘사되는 장면이 주로 다나에라는 미술 작품으로 표현되고 있다. 신화의 내용을 가장 충실하게 표현한 작품은 마뷔즈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플랑드르 화가 얀 호사르트(1478~1532)다나에’가 아닐까 싶. 첨탑으로 표현되는 배경이 상당히 복잡하지만 공간 구성, 배경의 건물이 복잡한 원근법과 연결되어 매력적이다. 비로 변신한 제우스를 치마로 받고 있는 신화에 충실한 배경과 푸른빛 드레스는 성처녀로서의 다나에를 상징한다. 다나에가 치마를 펼치고 앉아 소나기로 쏟아지고 있는 풍부한 황금비를 순진한 처녀의 눈빛으로 신비한 듯 바라보며 황금비를 받아내고 있다. 순결한 생명력을 가진 여인의 모습과 비의 따뜻함이 증대되었다.

 



  코레조, 1531-32, 다나에, 193X161, 보르게세 미술관


16세기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다 코레조(1489~1534)가 그린 다나에역시 신화에 충실한 그림으로 다나에의 두 다리 사이에 황금비를 받을 베일이 걸쳐져 있다. 마뷔즈와 다른 점은 사랑의 신 에로스가 등장하고 다나에가 그리스 여신의 자태로 침대에 반쯤 드러누워 있는 포즈을 취하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그림 속에서는 황금소나기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황금빛 구름 속의 비가 쏟아지기 직전인 듯도 하다. 에로스가 황금비를 받아 내기 위해 베일을 잡고 황금구름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코레조는 침대 아래에서 꽁냥꽁냥하고 있는 두 어린아이를 등장시키는데 잉태의 상징 인듯하다.


티치아노, 1553, 황금비를 맞는 다나에, 181.2X 129, 프라도 미술관



티치아노, 1545-46, 다나에, 172X120,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

티치아노, 1533-54, 다나에, 187X120, 에르미타주 미술관


티치아노 추정 1554, 다나에, 152X135, 빈 미술사 박물관


다나에에 대한 해석은 격렬한 논쟁 속에서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의견들을 보이고 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랑까지도 타락시키는 부와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황금은 어떤 장애도 도덕적 가치 및 여성의 정조까지도 뛰어 넘을 수 있는 위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 의해 다나에는 돈에 의해 유혹받은 여인이나 돈 때문에 몸을 파는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황금비가 쏟아지는 금화로 묘사되기도 한다.


누구보다도 다나에를 많이 그렸던 화가는 티치아노 베첼리오(1488~1576)이다. 티치아노의 다나에에는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 큐피트 그리고 황금비를 받아 내고 있는 늙은 여인이 보인다. 그는 귀족적이고 선정적인 작품을 많이 그렸는데 다나에도 비너스처럼 품격 있고 고전적으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황금에 대한 탐욕을 늙은 여인으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예술가의 묘사를 따르면 황금비의 기적은 늙은 여인에게는 탐욕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나에의 경우에는 세상을 구원할 모태로 자신을 변화 시키고 있는 과정이다. 돈으로 여자의 성을 사는, 돈에 몸을 팔도록 하는 탐욕의 상징인 늙은 여인은 젊고 아름다운 다나에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육체적 쾌락의 덧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틴토레토, 1577-78, 다나에, 182x142, 보자르 미술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고대 신들의 신화를 부정하였고,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신하여 다나에를 유혹한 것을 두고 여성이 돈을 위해 순결을 팔아야한다는 암시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6세기에도 다나에 신화는 모든 에로틱한 회화의 원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도덕주의자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나 화가들에게는 매력적인 주제였다. 다나에 이야기는 여성들이 자신의 정조까지 희생할 수 있는 돈과 황금의 힘을 한마디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화가 자코포 로부스키(필명 틴토레토,1518~1594)는 아예 드러내 놓고 창부의 보습을 그렸다. 다나에는 아름다운 천으로 장식 된 방에서 금화를 세고 있다. 반쯤 기대고 앉아 금화를 세는 모습이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는 것이 전형적인 코르티잔(고급창부)의 모습이다. 틴토레토는 티치아노와는 달리 젊은 시녀를 등장시켜 앞치마로 비켜 떨어지고 있는 금화를 받고 있다. 은근 다나에를 부러워하는 몸짓이다. 바닥에는 개가 만족스러운 듯 드러누워 있다. 개도 돈의 맛을 아는 듯하다.

 


 램블란트, 1636-43, 다나에, 202.5X185 에프미타주 미술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상반되는 방향에서는 높은 탑에 갇힌 다나에를 어떤 남자도 접근 할 수 없는 순결하고 정숙한 여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렘브란트의 다나에는 침대 머리맡에서 두 손이 묶인 채 울부짖는 큐피드와 커튼 뒤로 늙은 노파가 보인다. 다나에는 다리를 모으고 머리를 단정하게 손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큐피트의 몸부림은 억압된 사랑을 상징하고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다나에는 생생하고 육감적으로 느껴진다.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를 애틋하게 기다리며 살짝 미소 지은 다나에의 표정에서는 사랑을 갈구하는 관능적인 모습이나 사랑을 파는 퇴폐적인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자애롭고 정숙한 모습의 경건함을 보여준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12, 다나에, 53X41,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1621, 다나에, 226.7X161.3, 게티 미술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1563~1639)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2)는 부녀지간이다. 딸은 아버지에게서 재능을 물러 받아 화가의 길을 걸었고 그 당시로서는 드문 여류화가로 명성을 날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여자로서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 있었다. 여류화가의 아버지는 딸을 동료이자 친구인 아고스티노 타시의 문하생으로 보내는데 딸은 아버지의 친구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한다. 당시 유부남이었던 타시는 아르테미시아와 결혼을 약속하지만 이행하지 않았고, 타시는 1612316처녀성 강탈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1612년에 그려진 아르테미시아의 다나에는 오른손을 불끈 쥐고 있으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 아픔과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림배경의 뒤편 하녀로 보이는 여인은 황금동전을 받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녀의 아버지 오라치오도 딸과 똑 같은 소재로 다나에를 그렸다. 하지만 서로 표현하고 있는 바가 확연히 다르다. 오라치오의 그림에서는 에로스가 황금소나기를 천으로 받아 내고 있고 다나에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왜 딸의 아픔을 담은 다나에와는 상반된 다나에를 그렸을까? 아르테미시아는 예술적 재능뿐 아니라 아름다운 미모로도 유명했다. 오라치오는 아르테미시아를 누드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가 딸의 누드를 그렸다는 점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묘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여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뿐인가 타시의 돈을 받고 그의 석방에 동의 하였으며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아르테미시아의 성을 바꾸어 서둘러 시집을 보내 버리기도 하였다. 돈이라면 뭐라도 할 것 같은 그의 그림 다나에2016년 작가 최고가를 기록하여 약370억원에 낙찰되기도 하였다니 황금빛 빗물이 아닌 동글동글 황금동전과 어쩜 잘 매치가 되기도 한다.




  티에폴로, 1736, 다나에와 제우스, 53X41, 스톡홀름대학교 예술사 연구소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1696~1770)다나에와 제우스는 에로틱함이 가미된 신화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고 있다. 돈에 몸을 파는 다나에를 헤픈 듯 경박스러워 보이는 풍만한 여인으로, 신들의 제왕을 못생기고, 힘없고, 늙은 남자로 표현하고 있다. 신들 중 최고의 신 제우스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무궁무진한 변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목적을 달성한다. 티에폴로의 그림에서는 변신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늙어 변신 능력이 떨어진 것인지, 그의 욕망에 대한 덧없음을 나타내는지 늙고 초라한 모습이다. 제우스는 독수리로 변신하기도 하고 조종하기도 하는데 다나에의 작은 개가 독수리를 보고 짖어 대고 있다. 독수리마저도 별 볼 일 없는 모습이다.



슬레포크트, 1895, 다나에, 82.5x81.5


독일 인상파 화가 막스 슬레포크트(1868~1932)1899년 뮌헨 세션 전시회에 다나에를 출품한다. 당시 평론가들은 이 작품의 묘사가 관객에 대한 모욕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리고 시 재판소에서는 슬레포크트에게 도시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100 여 년 전 독일에서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한 시선으로 그림을 보자. 다나에는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누워 있다. 할 일 다 했으니 다음은 네 알아 해라는 듯 두 손을 깍지 끼어 머리 뒤로 받치고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는 모습이 보는 이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거북스러움을 준다. 늙은 여인은 탐욕에 눈을 반짝이며 동전을 받느라 정신이 없다. 인물의 묘사나 내용은 화가의 몫이지만 감상은 관객의 몫이라 에로스에서 창녀로 전략한 다나에의 적나라한 묘사에 충격을 받았나보다.




 클림트, 1907-08, 다나에, 77X83, 개인소장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다나에는 근대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여성의 성에 대한 환희를 긍정하고 황홀감 자체를 시각화하고 있다. 클림트의 다나에는 기존의 다나에와는 많이 다르다. 누워있는 자세도 아니고 쏟아지는 황금비를 받아 주는 에로스나 하녀도 없다. 전혀 다른 구도와 황금빛 연금술사답게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긴 붉은 머리칼을 풀어 헤친 여인은 엄마의 자궁 속 태아처럼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자는 듯 꿈꾸는 듯 몽환적인 포즈를 취하며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다리 사이로 마구 쏟아지고 있는 황금비와 사랑의 극치로 혼연일체가 되어 황홀경에 빠져 있는 몽환적인 모습의 다나에를 표현 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형상은 다나에의 허벅지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황금비다. 황금비는 씨앗이고 튼실한 허벅지는 풍부한 대지로 관능의 메타포요 잉태를 위한 생명력을 담고 있다. 청동탑에 갇혀 세상과 단절 되어 있지만 누구보다 행복하며 건강한 아름다움을 가진 다나에로 잉태의 순간을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만족감으로 포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나에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에로틱한 주제에 속하면서도 다양한 해석과 표상을 이끌어 내었다. 절제와 정조, 사랑 받는 이, 여인의 마음이 열리는 순간, 매춘, 황금의 절대적 위력, 금지된 사랑, 에로틱한 쾌락 등 다나에만큼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의견이 분분하고 격렬한 대립적 해석을 낳은 주제도 드물 것이다. 같은 주제 다른 그림에 대한 감상은 결국 관람자의 몫일까? 그렇더라도 그림에 대해 제대로 알고 보면 전달하고자하는 의미와 그것과는 상관없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관념의 세계가 날개를 달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