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세계

피카소의 통과의례 ‘액막이’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

#경린 2021. 3. 1. 21:30

일반인들의 상상력과 논란을 무한히 뒤흔들면서도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로 우리는 피카소를 꼽기에 스스럼이 없다.

 

그의 아버지는 피카소의 타고난 소질을 한 눈에 알아보았고 자신의 물감과 팔레트 붓을 물려 준 뒤 자신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피카소는 13세에 스페인 라 코루냐 미술학교에서 전통적인 회화방식을 완벽하게 소화를 해 내었으며, 1901년 파리의 갤러리 볼라르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고 눈부신 신인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큐비즘(입체주의) 미술의 시초를 알리고 있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발표 당시 사람들에게는 혐오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었으 피카소가 오랜 고심 끝에 큐비즘 미술로의 전환점을 찍은 최초의 작품이다. 현대 회화의 시금석 역할을 한 중요한 작품이며 피카소 개인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액막이'라고 부른 하나의 통과의례였다(존 리처드슨, 1991).

 

<아비뇽의 처녀들>에 영향을 준 그림들

1902~1903년에는 사회 주변부에 있는 우울한 인물들을 청색으로 표현하며 청색시대라고 자신이 명명한다. 이 시기 아비뇽의 처녀들에 영향을 준 작품은 소설 속 애꾸 뚜쟁이를 그린 <셀레스티나>이다. 셀레스티나는 탐욕스럽고 고약한 뚜쟁이 노파로 미술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청색시대에 이어 장밋빛시대로 이어지며(1904~1906) 작품들은 좀 더 가볍고 서정적인 느낌을 보여준다. 1907년에 그려진 <하렘>7년간 애인으로 지낸 페르난드 올리비에와 의 충족감을 나타낸 작품으로 남근을 암시하는 정물은 <아비뇽의 처녀들>에서도 보여 진다.

 

<셀레스티나>, 1903, 피카소, 81X60cm, 유화

 

 

<하렘>, 1906, 피카소, 154.3X109.5cm, 유화와 목탄

 

1906~1907년 피카소는 누드에 관심이 많았고 앵그르, 들라크루아, 마티스, 세잔 등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오른쪽 아래 등을 보이며 쪼그리고 앉은 여인의 뒷모습은 세잔 사 후 전시된 <목욕하는 여인들>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샬롱에 전시 된 앙드레 드랭의 <목욕하는 사람들>, 마티스의 <청색 누드>는 사람들 사이에 화재가 된 작품들로, 그 시대에는 도전적인 그림이었다. 피카소는 그들을 뛰어 넘어야 했다.

 

 

<목욕하는 여인들> 폴 세잔, 50X50cm, 유화

 

 

<청색 누드>, 1907, 마티스, 92.1X147.5cm,

 

작품 구상 단계에 그려진 피카소의 드로잉 작품 만 약 5백여 점이 넘는다. 작품을 그리기 전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고민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아비뇽의 처녀들> 탄생을 위한 스케치는 특히나 방대한 양이었다. 맘만 먹으면 기존 미술계에서 인정할 만한 그림을 얼마든지 그릴 수 있었던 피카소였지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그에게 매우 기념비적이고 자기실험적인 작품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가 기존 그렸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큰 대작이었다.

 

<보르데로의 의학도, 선원 그리고 다섯 명의 누드>에서는 의학도(이성과 조절, 인간의 유한성, 정신적인 삶)와 선원(본능, 자유분방함, 감각적인 삶, 육체적 쾌락)을 함께 그려 성에 대한 상반된 느낌을 주고자 했다. 의학도는 커튼을 열고 등장하고 선원은 벌거벗은 여인들 사이에 앉아 있다. 그런데 <아비뇽의 처녀들>에 가장 가까운 그림으로 보여 지는 <다섯 명의 누드>에서는 두 남성이 사라지고 작품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그들의 노골적인 시선은 모두 관객으로 향한다.

 

<보르데로의 의학도, 선원 그리고 다섯 명의 누드> 1907, 피카소, 47.7X63.5cm, 목탄과 파스텔

<다섯 명의 누드> 1907, 피카소, 17.2X22.2cm, 수채화

 

피카소는 고대 이베리아와 아프리카의 조각품에서 영감을 받아 원시주의를 받아들이며, 1907년부터 자연주의적인 형식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 출발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은 피카소의 자전적인 의미를 가지며 자신에게 있어서 여성의 성에 대한 혼란스러운 느낌을 과격한 스타일로 표현했다. 작품에 대한 초기 반응은 당황스러운 침묵뿐이었다. 누드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던 당시 화가들에게 누드 자체는 별 것이 아니었으나 그들을 소름끼치도록 놀라게 한 것은 인물들의 얼굴이었다. 그 당시 피카소의 애인이었던 올리비에와의 시끄러웠던 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한다.

 

전위예술에서 여러 행태를 단순화 시키고 왜곡시키는 것은 원시주의적인 스타일을 채택한 결과이며 <아비뇽의 처녀들>이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 활동했던 많은 누드 그림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베리아의 <두상>이나 아프리카의 조각들은 <아비뇽의 처녀들> 얼굴 표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피카소는 <밀로의 비너스>보다 아프리카 조각들이 훨씬 아름답다고 반응했다는 것에서도 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의 배경은 피카소의 고향인 아비뇽가에 있는 사창가 매춘부이다. 피카소는 한 인터뷰에서 이를 부정하기는 했으나 친구들의 이야기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피카소는 이 작품에 처음 아비뇽의 사창가라는 제목을 붙였으나 그의 친구 살몽이 아비뇽의 처녀들로 바꾸었다. 피카소는 처녀들이라는 표현이 대중들의 위선적인 도덕심에 굴복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소녀들임을 알릴 수 있는 스페인어 제목을 원하였다 한다. 사창가 소녀들의 일그러진 표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1972년 레오 스타인백은 철학적인 사창가라는 글에서 화면을 가득 채운 늘어진 창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고 분석하였다. 그 외 <아비뇽의 처녀들>에는 삶을 긍정하게 하는 활기찬 에로티시즘과 함께 여성과 그 섹슈얼리티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이 공존한다거나, 실제로 피카소는 1902년 바로셀로나에서 성병에 걸린 적이 있기 때문에 그림의 기저에는 성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 1907, 피카소, 243.9X233.7cm, 유화

 

 

1916년 처음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이후 1924년 미술 수집가 자크 두세가 이 그림을 구입했다. 두세는 이 작품을 루브르에 넘길 생각이었으나 루브르가 이를 거절해 1939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구입 해 영구 전시하게 되었다. 루브르는 피카소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크 두세가 이 그림을 구입할 당시 그림이 루브르에 가게 될 것이라고 확신을 주었으나 그것을 지키지 못했고 피카소는 그림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동시대의 예술품을 소장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대부분의 유명한 박물관에는 한두 작품 만을 보기 위해 수천 명의 관람객이 줄은 선다. 현대미술관은 그러한 작품을 확보해야 했다.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20세기의 전환점이 되는 작품으로 <아비뇽의 처녀들>을 선택하였고, 미술관의 간판 작품이 되었다.

 

피카소에게도 뉴욕 현대미술관에도 <아비뇽의 처녀들>은 기존 상식의 전환점을 찍는 통과의례 '액막이' 작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