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주저림

심부름

#경린 2009. 8. 8. 11:56
 

 

어느 가을밤의 심부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늘 생생이 어제 일처럼 기억에 남아 저를 미소 짓게 하는 심부름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이고 두 살 위인 오빠가 중1이었던 해의 늦가을이었다고 기억을 합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새초롬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고 한 낮엔 제법 따뜻한 햇살이 등을 데워 주었던.... 달력에는 가을이 몇 날 남아 있는 그런 늦가을.. 술을 좋아하셨던 아버지께서 밖에서 약주를 드시고 오시는 길에 옆 집 사는 옥이언니 아버지를 만나 같이 저희 집으로 오셔서 또 술상을 받아놓고 기분 좋게 한 잔을 하게 된 저녁이었습니다.


 


근데 두 분이 그 술자리에서 뜬금없는 약속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집 큰 놈하고 그 집에 큰 딸하고 고마 이 참에 사돈이나 맺읍시다." "아! 그라까예. 그 좋지예." 두 분의 맞장구소리는 옆방에서 조용히 쥐 죽은 듯이 눈치 보며 공부하고 있는 저희 방에도 환하게 잘 들렸지요. 이 쯤 되면 당사자인 오빠를 부르실 것도 같고.... 역시나... "어야, 오빠 와 바라 해라. 을른" 아버지의 부르심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빠는 방문을 박차고 꽁지에 불붙은 다람쥐마냥 부리나케 그렇게 뛰어 나갔습니다. 오마나 기다렸다는 듯이 뛰쳐 나가는 저 폼새는 뭐여??? 미리 짝을 지어 주신다니 너무 좋아서 바리 뛰어나가 장차 장인어른 될 아저씨께 큰 절 이라도 하러 간 것???


 


그러나 아버지께서 오빠의 이름을 몇 차례나 불러도 오빠는 그 길로 오데를 갔는지 소식이 없고... 급기야 어머니께서 우리방으로 와 오빠를 찾으셨습니다. "오빠는 어데 갔노?" "몰라. 좀 전에 나갔는데. 어디 갔는 진 몰라." 오빠가 방금까지는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고 하자 아버지께서 저를 불러 지금 당장 오빠를 찾아오라는 심부름(심부름이라기 보다는 특명에 가까운)을 시켰습니다. "니, 나가서 너거 오래비 찾아 갇고 온나. 아부지가 빨리 오라고 한다 캐라."


 


애궁, 참말로!!! 그렇게 한 밤중에 오빠를 찾으러 밖으로 나섰습니다. 주로 우리들이 모여서 잘 놀러 다니는 장소들을 순서대로 찾아다녔지요....달빛을 친구삼아.... 기차역전 광장을 지나 철길 옆 탱자나무 밭에도 가보고, 구름다리(철길 육교) 위를 지나 우물가에도 가보고,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솥공장 옆 넓은 공터의 비밀구멍 속도 들여다보고, 오빠친구 집에도 가서 물어 보며 나름 열심히 오빠를 찾아 다녔습니다.....아이고 다리야.... 근데 어디에도 우리오빠는 없었습니다. 날도 춥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우리 아버지성격이 한 카리스마에 한 고집 하시는지라 오빠를 찾아가지 않으면 옥이언니 아버지께 체면이 안 서실 것이고 찾을 때까지 집에도 못 들어오게 할 것이 뻔한지라 종종 걸음을 치며 여기 저기 열심히 찾아 다녔지요.


 


오빠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 밤에 갈 곳도 뻔한듯하여 금방 찾을 줄 알았습니다. 그기다 언제나 철두철미, 잘 난 우리 오빠를 놀려 줄 절호의 찬스이니 신바람이 나서 발에 요롱을 단 것처럼 촐랑촐랑 까불거리며 의기양양 찾아 나섰던 발걸음이 차츰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더뎌졌고, 종국에는 길바닥에 다리 뻗고 퍼질러 앉아 울어 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정말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문디자석, 도대체 이 밤중에 어댈 갔단 말고.. 미치것네" 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서웠지만 어쩝니까 아무리 찾아도 없는걸........어깨가 축 쳐져 집으로 들어오는데.......... 그 때 당시 저희집은 인근에서 꽤 큰 건재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건재상 안쪽으로 살림집이 있었고 그 중간쯤에 집에서 키우는 땅개 ‘메리’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 앞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메리집 안에서 사람이 나와 제 팔을 확 나꿔 채더니 안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아이구 머니나 세상에!!! 이기 머꼬???" "쉿, 조용히 해" 우리 오빠였습니다. "오빠, 여기서 뭐하는데? 아빠가 찾꼬, 오빠 니 때문에 난리 났다. 오빠 니 아나?? " "알고 있다 고마. 조용히 하고 가마이 있거라. 아빠 주무시모 들어 가고로 알것재?" 오빠, 나, 그리고 졸지에 불청객을 둘씩이나 맞이한 메리까지, 그렇게 옹이옹이 붙어 앉았습니다. 차가운 밤공기에 메리의 집은 참 따뜻했습니다. 나는 추운데 나가서 열심히 발바닥에 땀나도록 오빠를 찾아 다녔는데 우리오빠는 메리를 품고 따뜻하게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메리집을 피신처로 생각해 내다니..... 우리오빠의 머리는 역시 비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야, 알았다. 그런데 오빠는 옥이 언니 싫나???" "니 같으모 조컷나?"


 


하긴 그랬습니다. 우리 오빠는 그 때 당시 꽤 똑똑하여 요즘 말로는 영재라는 소리를 듣는 축이었고 체격도 인물도 출중한 귀공자라 다들 아들하나는 잘 뒀다고 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자랑거리에 우리집의 기대주였지요. 근데 옥이 언니는 공부하고는 인연이 먼지 낙제생에다가 풍채(?)는 뒤에서 보면 아줌마들이 친구하자고 할 정도로 당당하였고, 인물은 할머니께서 열심히 힘껏 통통 치고 밟아 만드신 메주처럼 이목구비의 주소가 명확하지 않은(?) 뭐 그런 정도였으니 오빠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으며, 한 편으로는 옥이언니집에 딸만 있고 아들이 없다는 것이 천만 다행한 일이라고 어린 마음에 생각 했었지요...ㅋ ^^


 


아버지와 옥이언니 아버지의 술자리는 밤늦도록 이어졌고, 그렇게 오빠와 저는 비좁은 메리집에 꼭 붙어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깜박 졸기도 하였습니다. 오빠의 체온은 참 따뜻했습니다. 메리의 체온도 참 따뜻했습니다. 오빠의 향기가 참 좋았습니다. 메리의 향기도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잠이 들었습니다. 눈을 떠 보니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제가 잠이 들어 오빠가 저를 업어 옮겼다고 하였습니다. 메리가 집을 내어 준 덕분으로 무사히 간밤의 곤혹스러운 정혼(?)을 피해 갔던 오빠가 싱긋 웃으며 그 아침에 저에게 한 첫마디 " 문딩아! 살 좀 빼라이" ^^ 현재 저희 오빠는 꽃같이 예쁘고 마음 착한 색시 얻어 알콩달콩 잘 살고 있습니다. 그 날 저녁 메리집으로 피신 한 오빠의 판단은 참으로 현명하였던것습니다요. ^^ 울오빠도 아직 지난날 이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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